호서란 충청도를 별칭하는 지방의 명칭이다. 조선의 8도(道)는 기호, 관동, 호서, 해서, 호남, 영남, 관서, 관북 등으로 따로 이름하기도 하였는데, 이 별칭들의 유래는 거의 지형을 비롯한 자연 지리적 요소에 그 기준을 두고 역사적으로 불리웠다.
8도의 별칭은 13~14세기 문헌에 등장하는 것도 있으나, 15세기 후반부터는 전국에 널리 통용되었다. 지방의 별칭 가운데 ‘호(湖)’자가 포함된 것으로는 호남(湖南), 호서(湖西), 기호(畿湖)가 있다. 이는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의 별칭으로 쓰였다. 그런데 이들 별칭의 ‘호’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8도의 별칭이 호서, 호남을 제외하고는 ‘령(嶺)’, ‘관(關)’등 모두 지리적 요소와 부합되는 명칭이지만 ‘호’는 딱 잘라서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호남’의 경우, 그동안 제기된 주장은 ‘호’를 제천(堤川)의 三韓時代 관개용 저수지 못(池) 의림지(義林池), 中原 忠州 한강 달성강 합류 탄금대(彈琴臺), 김제(金堤)의 三國時代 관개용 저수지 벽골제(壁骨堤), 금강(錦江), 중국 지명의 이식, 백제문화의 후계자로서의 의미로 백제 영토 전역으로 보아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있었다.
이들의 여러 주장들 가운데 ‘호서, 호남’의 ‘호’를 금강(錦江)으로 보는 설은 이 강이 한 때 ‘호강(湖江)’으로 불렸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또한 고려 때의 10도제 실시 당시 금강 이남을 ‘강남도(江南道)’라 한 것과 관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금강을 호강으로 불렀다는 기록은 『고려사』이후의 모든 기록에서 아직까지는 찾아볼 수 없다.
‘호’를 금강으로 보고 호남을 금강 이남으로 본 주장은 금강에는 강해(江海)나 피해(陂海), 즉 ‘호’로 받아들여진 구간이 포함되어 있으며, 대체로 금강 이남에 속하는 전남·북을 호남지방으로 설정하고 있는 지리학계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호남의 ‘호’는 호서의 ‘호’보다 백여 년 전부터 쓰여 졌다. 그러므로 의림지의 남쪽이나 벽골제의 남쪽이란 뜻과는 무관하다. 벽골제는 호남의 별칭이 사용된 시기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결국 ‘호’는 금강 이남의 전라도를 별칭하는 것이다.
충청도의 별칭인 호서라는 명칭은 호남이란 별칭이 널리 사용된 이후 생긴 명칭이다. 호남은 고려 말~조선 초기부터 그 명칭이 사용되었으나, 호서는 16세기경부터 사용된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그 명칭의 유래는 다분히 금강의 서쪽이라는 데에서 연유한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충청도 호서(湖西)는 의림지의 서쪽이라는 지명으로 인해 호남과 대칭적으로 짝지어지는 데서 유래했다고 본다.
호남사람들은 북쪽인 서울로 갈 때에 서행(西行), 서유(西遊)라고 하였다. 호남의 북쪽은 호서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지명은 작은 지명보다는 산천을 경계로 큰 지명을 사용하였다. 결국 호서는 호남의 북쪽이면서 금강의 서쪽으로 충청도의 한 별칭으로 부른 것이다. 호서사람의 중심지이었던 회덕, 연산, 노성의 선비들은 이 지역을 호중(湖中), 호산(湖山)이라 자주 썼다. 그리고 호중이라고 했던 대전지방의 가까운 금강 본류에는 지역에 따라 미호(渼湖), 용호(龍湖), 황호(黃湖) 등의 여러 ‘호’자 지명이 있고, 금강과 미호천이 합류하는 곳을 합호(合湖), 합강(合江)이라고 부르고 있다.
호서라는 별칭은 충청도라는 도명과 함께 큰 구분 없이 같이 썼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관찬기록에 ‘호서유생(湖西儒生)’, ‘호서토적(湖西土賊)’이라든지, ‘호서대동법’과 같이 충청도를 호서로 기록하였다. 또한 충청도의 사족들은 그들이 남긴 글에서 충청도란 명칭보다 호서라는 지명을 즐겨 썼다. 호서는 충청좌도, 충청우도와 같이 호좌(湖左), 호우(湖右)라 하여 서울을 기준으로 호좌는 지금의 충청북도, 호우는 충청남도에 해당된다.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동리 성산(城山)앞 옛 직산현 관아(官衙)옆에 호서계수아문(湖西界首衙門)이 직산관아(官衙)와 함께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어 보존(保存)되고 있다.
※ 위 글은 忠淸南道誌(2008)를 참고하여 기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