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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목천현감 ‘안정복’을 바로알자

김성열 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장 기고/ 목천의 향토지 '대록지' 편찬 주도... 18세기 모범읍지로 평가받아

등록일 2015년10월29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안정복(安鼎福) 1712(숙종 38)~1791(정조 19) 이조 정조 때의 학,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菴)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연헌(椽軒)시호는 문숙(文肅)본관은 광주(廣州), 안극()의 아들이다.

1776년 정조 즉위 원년 9월에 목천현감으로 임명받아 10월에 부임했다. 이때 나이 65세로 지방관으로는 정년을 훌쩍 넘긴 나이다. 안정복은 일찍이 과거에 응할 생각을 버리고 이황(李滉)에 사숙했고, 이익(李瀷)의 학문을 계승하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면을 학문의 목적으로 하는 실학을 깊이 있게 연구했다.

읽지 않을 책이 없을 정도였으며 특히 주자(朱子)<대전어류 大全語類>에 밝아, 남을 가르칠 때나 정치를 할 때나 주자학을 토대로 하였다. 그의 명성이 전국에 높았으므로 1749(영조 25)에 후릉 참봉(厚陵 參奉)에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만녕전 참봉(萬寧殿 參奉)으로 처음 벼슬하고 1751년 의영고 봉사(義盈庫 奉事), 이어서 그 후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에 이르렀다가 물러섰다.

1772(영조 48)에 왕세손(정조)의 스승으로서 남다른 대우를 받았으며, 안정복은 29개월간(177610~17796) 목천 현감으로 재직했다. 비교적 오랜 기간이었다. 의욕적으로 행정을 펼쳤다. 주민부역 부담을 줄이고, 향약 시행으로 향촌사회 질서를 회복하려 힘을 썼다. 같은 행정적 치적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목천의 향토지()를 만들어 지금까지 전해준 사실이다. 그는 고을 수령으로선 이례적으로 마을역사 복원에 나섰다.

동국여지승람에 포함된 목천 내용은 너무 적고, 읍지가 있으나 너무 빠진 게 많아 참고할 게 없다며 새 향토지 대록지’(大麓은 목천 옛 이름) 편찬을 주도했다. 고을 양반들에게 향토사료 수집을 요청했다. 6개월에 걸쳐 성씨, 산천, 학교, 묘소, 사찰, 누정, 인물, 고적, 서적 등에 대한 것을 모았다. 나라에서 편찬한 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보다 더 많은 내용을 포함시켰다. 사학계에서는 18세기 읍지 편찬의 추이를 잘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모범적 읍지로 평가하고 있다.

1781(정조 5) 돈령주부(敦寧主簿)가 되었다가 헌릉령(獻陵令)으로 전근 관직의 사직과 복직을 거듭하다가 1789(정조 13) 오랫동안의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 이어서 첨지중추(僉知中樞), 이듬해에 동지중추(同知中樞)에 승진하여 광성군(廣成君)에 피봉 되었다.

세자가 책봉되자 또 세자의 스승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임하였다. 특히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저술하여 과거의 역사지리학을 비판하고 우리 역사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세웠으며, 민족사관 형성의 기초를 제공했다. 저서로는 <순암집> <동사강목(東史綱目)> <상헌수필(橡軒隨筆)> <지리고(地理考)> <복부(覆瓿)> <하학지남(下學指南)> <희현록(希賢錄> <가례집해(家禮集解)> <홍범연의(洪範演義)> <천학고(天學考> 등이 있으며, <복부>에는 한문소설 <홍생원유기(洪生遠遊記)> <여용국전(女容國傳)> 등의 작품이 있다.

1779년 그가 목천을 떠나자 2년 후 주민들은 선정비()를 세웠다. 정비와 관련해 흥미로운 일이 그의 연보(年譜)에 보인다. 목천 현감이 된 지 얼마 안 돼 그를 칭송하는 목비(木碑)들이 세워졌다. 이를 보고 당장 뽑아 버리게 했다. 이유는 조금이라도 혜택이 있으면 비를 세워 칭송하니. 만약 조금이라도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목비를 쪼개버릴 것이다.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는 것은 관장(官長)을 가지고 노는 뜻이 있으니 아름다운 풍습이 아니다.” 그런데 퇴임 후까진 반대하지 못해 선정비가 섰다.

선정비는 수령들이 주민들을 부추겨 억지로 만들기도 해, 조정에서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반면 안정복처럼 선정을 베풀어 주민 립기념관 제7전시실 옆 잔디밭에 서 있다. 당초 천안시 북면 연춘리 복구정 옆에 있었는데 보존상의 문제로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립기념관 한켠에 거의 방치하다시피 보존되고 있다. 아무런 안내문도 없이 홀로 덩그러니 나무그늘 아래 서 있다. 독립기념관 전시물과 직접적인 연과성이 없으니 홀대를 받을 수밖에 없다.

돋보이는 실학자 영세불망비 안정복 선정비는 천안시민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랑스럽게 서 있어야 한다. 독립운동과는 직접 관련성 없는 비석이 독립기념관 구석에 서 있을 이유가 없다.

천안향토사학계는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진 안정복 선정비가 천안박물관에 새로이 조성되는 야외 전시장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독립기념관과는 연고도 없이 볼품없게 외로이 서 있는 영세불망비 안정복 선정비를 천안박물관 야외 전시장으로 옮겨져 시민들과 세상에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게 옳다는 주장이다.
역사학계에서 모범 읍지로 손꼽는 대록지를 편찬하고, 역사지리학교과서 동사강목을 저술한 문숙(文肅) 사문(斯文) 안정복 광성군(廣成君) 현감의 시대정신을 우리시대에 전승 선양하자.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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