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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작사자는 누구? ‘진실찾기 필요해’

김성열 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장

등록일 2015년07월05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애국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국가(國歌)로 사용해 오고 있다.
애국가는 광복69년을 맞는 2014년 현재에도 작가 미상이다.

애국가는 무궁화 태극기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가 상징중의 하나이다. 국가상징 애국가 작사가를 고증이 가능함에도 지금껏 무시하는 것은 나태함이라고 생각한다.

애국가 사료를 분석해보면 애국가는 단독의 작사보다는 윤치호, 안창호를 비롯한 다수의 민족지사들이 창작하고 보급했던 민족의 노래임을 알 수 있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의 작자 확정을 위해 최남선을 위원장으로 하는 심의위원회를 만들어 5명을 심사했다. 관련된 증언과 문헌, 당사자들의 주장 등을 종합한 결과 당시 윤치호 독립협회 회장이 가장 유력한 작가가로 추정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윤치호 단독 작사설을 확정하고자 표결을 거쳤으나 11대 2란 결과를 도출했다. 이에 윤치호 작사설은 만장일치가 아니란 이유로 부결, 지금까지 작가 미상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윤치호 작사설의 근거는 1908년 윤치호가 역술한 '찬미가'란 책의 14장에 애국가가 수록되어 있고, 1910년 미주에서 발행된 신한민보 기사에 애국가 가사가 윤치호 작이란 이름으로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윤치호 작사설을 부정하는 가장 큰 목소리는 도산 안창호 설이다. 안창호가 작사가라는 주장은 안창호가 선천예배당에서 금식기도를 마친 뒤, 성령의 감화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는 애국가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상해 임정에서 애국가가 국가로 채택될 수 있도록 가장 노력했다는 점, 안창호 주위 사람들의 도산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 하지만 안창호 작사설은 안타깝게도 문헌적 근거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

혜문스님은 얼마전 국사편찬위원회의 1955년 애국가 심의 자료집을 살펴보다가 최남선이 ‘1907년 윤치호 작이 진(眞)이라면 윤씨 작이라 하여도 무방(無妨)할 것이다'라고 기록한 부분을 발견했다. 이 구절은 윤치호가 직접 붓으로 쓴 친필본 애국가 가사지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친필본 애국가에는 자신이 작사가임을 명기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윤치호는 분명히 애국가를 자신이 작사했다고 문서를 남겨놓은 부동의 증거인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작사가가 직접 남긴 애국가라면 원본 수준의 엄청난 가치를 갖는 기록물일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윤치호의 친필본 애국가 가사지가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가로 인정받지 못하자 후손들이 1997년 윤치호의 모교인 미국 애틀랜타의 에모리 대학에 윤치호 애국가 원본을 기증해 버렸다고 한다. 많은 문헌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윤치호는 왜 정부로부터 애국가 작사가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윤치호가 일본이 도발한 대동아 전쟁에 우리 한민족 동참을 호소했던 반민족 친일파로 규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사실과 윤치호가 반민족친일행위자란 사실은 별개의 사실이다. 역시 대표적인 반민족 친일행위자의 한 사람인 박영효가 만든 태극기가 국기로서 인정받고 있다. 지난해 가을 혜문스님은 에모리 대학에 서면으로 애국가 원본을 보고싶다는 열람신청서를 보냈다. 훼손 우려 때문에 보여줄 수 없다는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에모리 대학측은 사진촬영 불허란 조건으로 2014년 1월 30일 원본열람을 허가했다.

윤치호가 여러명의 애국가 작사가 중의 하나라면 윤치호 친필본은 당연히 한국에 소장되어야 한다. 친일파란 이유로 애국가 작사가란 사실이 부정되어선 안 되며, 친일파 작사 애국가이기 때문에 작가미상 상태로 남겨 두려고 해서도 안된다. 더이상 작사자미상의 애국가를 방치할 수 없고, 애국가 작사가의 애국가 친필본이 미국에 있다는 모순된 사실도 방치할 수 없는 일이다.

해방 70년을 맞는 이제는 작사미상의 애국가의 작사가를 정부가 확정해 주어야 한다. 애국가 작사가 윤치호의 친필 애국가 가사문서를 대한민국이 볼수 있어야 한다. 하늘샘교회 역사관에서는 에모리 대학 한국인교수, 학생들과 연락하여 애국가 가사문서, 사진을 수집하려한다.

윤치호 박사는 1903년 천안군수로 부임하여 천안지역 개화 개명 독립정신을 일깨운 선각자이다. 천안읍감리교회(서릿말) 설립을 위한 기도의 초석을 놓았다. 그후 천안읍감리교회가 세워지고 천안예배당(서릿말), 천안교회(문화동), 제일교회(문화동), 중앙교회(성황동), 하늘중앙교회(백석동), 하늘샘교회(풍세로)로 발전했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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