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뉴스등록
맨위로

상왕산(尙王山) 정승골 전설

김성열 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장 기고칼럼

등록일 2015년06월01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독립기념관 겨레의집 자리에 있던 동네 산 20번지 목천읍 남화리 통미산 서쪽 아늑한 골이 상정승 골이다. 상왕산(尙王山) 상정승 골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목천 상씨(尙氏)는 백제국 복고운동을 일으켜 고려 조정으로 부터 미움을 받고 천민으로 몰락 되어 축성(畜姓) 코키리 象氏가 되었던 가문이었다. 후손 상득유(尙得儒)가 고려 때 시빙제(侍聘齊) 학사가 되어 향역(鄕役)을 면하고 木川 尙氏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 9대 임금 성종24년 1493년에 조선 명재상 정승 상진(尙震)이 태어난 곳이 상정승 골이라고 전해온다. 한편 부여군 장암면 합곡리 출생설도 있다. 통미산은 목천읍 남화리 남벌 뒤에 외따로 있는 산인데, 흑성산 아래 현재 독립기념관 추모의 자리 위봉에 해당한다. 목천과 부여에 똑같이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상정승의 아버지는 찰방(察訪) 벼슬하던 상보(尙甫)인데 재산이 많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꾸어 주고 먹을 것을 대주었다고 한다. 인심이 후한 그는 몇 년에 한 번씩 가난한 이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의 채권증을 불사르면서 나중에 형편이 좋아지면 갚으라고 탕감해 주기도 하였다.
상진은 문과 급제하여 조선13대 임금 명종4년(57세) 이조판서 명종13년(66세) 영의정이 된다. 상정승이 한양에서 살던 솔고개는 상정승 골이라 불리우는데 지금은 서울의 상동(尙洞 )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영의정에서 물러난 뒤 상진은 남대문 바로 옆 솔 고개에 저택을 짓고 살았다.

한양을 드나드는 수많은 과객들이 그의 사랑방으로 찾아든다. 인심 좋고 덕망이 높은 상정승은 모든 과객들을 후하게 대접한다. 특히 충청도와 그의 고향 목천 땅에서 많은 과객이 이곳으로 찾아온다. 놀랍게도 상정승댁은 1886년 말 의사이자 목사인 스크랜트 선교사가 매입하여 성동병원교회를 설립하는 장소가 된다. 스크랜튼은 미국 출신으로 1886년에 고종 황제로부터 시병원(施病院)이란 휘호를 얻어 상정승 골에서 의료사업을 시작한다.

1200평 부지를 매입하여 처음에는 약국으로 시작하여 나중에 병원을 개원한다. 바로 이곳이 독립운동의 산실이요 중심지가 된다. 목천 출신으로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의장이 된 천안 목천 출신 이동녕선생도 1907년에 尙洞교회에서 세례 받고 독립정신을 배우고 기독교인이 된다.
천안 출신의 정승 집이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는 병원이 되고 또 민족의 선각자들을 양성하는 산실이 되어 임시정부를 이끈 독립운동가가 배출된 요람이 된 것이다.

또 천안 목천과 부여 장암에는 청혼을 거절하고 패가한 상정승 가문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상정승이 말년에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 향리 목천에 낙향해 살았던 때 일이다. 상정승은 조선조 삼대 명상의 한 사람으로 목천의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상정승은 정사에 명석하면서도 덕이 두텁고 청렴한 인물이다. 상진에게는 아직 장가들지 않은 아들이 있었다. 준수하여 재상가에서 사위 감으로 욕심내던 청년선비였다.

어느 한 촌 백성이 상정승을 어렵게 찾아와 힘들여 하는 말이 딸이 하나 있는데 어려서부터 촌부의 딸답지 않게 총명하고 기이한 데가 있어 성장하면서 비범하여 촌부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딸이었다. 나이도 과년하여 출가를 시켜야 할 때가 되었는데 내가 꼭 시집 가야할 곳이 있다며 모든 혼담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번번이 물리쳤다. 꼭 시집 갈 곳은 천정배필이 상정승 어른댁 자제라 혼사가 이루어지면 상정승 댁도 계속 번창 할 것이라 했다. 죽음을 무릎 쓰고 간청하는 딸이라 외람된 말씀을 무릎을 꿇고 아뢰는 것이다.

상정승은 그렇게도 평소 두터운 덕은 아랑곳없이 지나치게 노기를 크게 띠우고 참담하기 그지없구나 썩 물러가라 호통 치며 촌백성을 내 쫓았다. 돌아와 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으나 딸은 그 댁으로 시집가지 아니하면 그 댁은 패가한다며 막무가내로 다시한번 간청해 달라 한다.

촌부는 딸이 비범한 인물임을 알고 다시 용기를 내어 정승 댁 뜰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아뢰었다. 그래도 상정승은 더 크게 노기를 높여 가며 요망한 딸의 소리를 꾸짖으며 하인을 시켜 아비를 동구 밖으로 끌어내었다. 갖은 수모를 겪고 돌아온 아비를 보고 말리는 간곡한 사정을 물리치고 딸은 상정승 댁에 직접 찾아갔다.

비록 미천한 신분이나 세상을 짐작하는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으니 정승 어른 자제분과 혼사를 이루게 간청을 했다. 상정승은 처자의 몸으로 스스로 청혼하는 무례를 꾸짖으며 고금에 들어 보지 못한 망칙한 말이라 노기가 높아 간청을 나눌 수 없이 내당으로 들어갔다. 딸은 처자의 몸으로 청혼하다 거절당하면 어찌 하늘에 머리를 들고 살겠는 가하여 처자는 대돌에  머리를 부딪쳐 목숨을 끊었다.

처자가 죽어 나자빠지자 그제서야 상정승은 당황하며 손을 써 보았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상정승은 삼베로 시체를 싸서 하인들을 시켜 처자의 집으로 보냈다. 그 후 상정승은 뒤숭숭 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세월이 가면 잊으려니 하였으나 처자의 피 흘린 처참한 모습이 자꾸 떠올라 괴로웠다.

그 후 상진은 72세에 서거하여 고종명(考終命 )하였으나 가세가 차차로 기울고 자손이 자꾸 꺾이어 상정승 사후에 몰락하고 말았다. 상정승은 원만무애(圓滿无涯)한 성품에 덕언(德言)이 아니면 입에 담지  않는 분인데 어찌해서 처자에게는 그토록 박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흑성산 자락에 전해오는 목천 상왕산과 尙정승댁 전설이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유료기사 결제하기 무통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가장 많이 본 뉴스

종합 뉴스 라이프 우리동네 향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