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향토사가들과 유림들의 끊임없는 민원제기로 400년만에 온조왕사당이 직산향교 옆에 조촐하게 건립됐다.
온조왕 사당이 20일 준공식을 가졌다. 사당건립에 들어간 사업비는 모두 13억원. 직산향교 옆 2730㎡ 부지에 76㎡ 규모로 사당, 삼문, 화장실 등을 건립했다.
이번 온조왕 사당건립은 1597년 정유재란때 소실된 것을 418년만에 다시 건립한 것이다. 온조왕이 BC 18년부터 BC 5년까지 13년간 최초로 도읍을 정하고 찬란했던 대백제 700년 역사의 서막을 연 곳이 바로 천안이다. 이에 사당건립은 역사적 정체성을 재확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온조왕(?~AD28)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셋째아들로, 북부여에서 동명성왕의 전처소생인 유리가 졸본부여로 찾아와 고구려 태자가 되자 형인 비류와 함께 남하해 비류는 미추홀,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BC18년 국호를 백제로 고쳤던 인물이다.
엄천섭 시 문화관광과장은 “온조왕 사당 건립은 천안이 백제 초도로 인식했던 조선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실증적 자료”라며 “천안 직산이 백제 건국의 첫 도읍지임을 후세에 알리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게 됐다”고 밝혔다.
행사는 조촐하게
20일 오후 2시 온조왕 사당 준공식이 있는 현장. 사당건립을 추진했던 지역인사들의 대화가 걸작이다.
“참으로 어렵게 건립되었습니다.” “어려운 게 아니라 억지로 된 것이지요.”
그간 천안향토사가들은 사당 필요성을 끊임없이 제기해 왔다. 백제 첫 도읍지인 직산에서 백제시조인 온조왕을 숭모하고 직산초도설을 통한 천안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를 전 천안시장인 성무용 시장이 받아들였고, 추진절차를 밟아 오늘에 이르렀다.
그래서였을까. 구본영 시장 대신 전병욱 부시장이 참석한 온조왕 사당건립 준공식은 20여분만에 끝났고, 행사장을 찾은 내빈도 100명이 채 안됐다. 이들은 온조왕 사당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일부는 기념사진 등을 찍고 돌아갔다.
이번 온조왕사당이 건립되면서 매년 직산현관아에서 지내온 ‘온조대왕 숭모제’가 둥지를 틀 수 있게 됐다. 2014년 5회째 접어든 숭모제는 백제개국공신 문종 종친, 백제충의 오성문중 종친, 천안향교 전교가 공동대표를 맡아 봉행했다. 시는 1년에 한번 숭모제를 지내는 터이자 직산현관아, 천안향교와 더불어 관광객과 마주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백제초도 상징적 의미 부각
온조왕 사당은 건립과정에서 논란이 일었다. 사당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산직촌이 군부대 제한구역 내에 있다는 이유로 부득이 ‘역사적 장소’를 택하지 못했다.
차선책으로 삼은 곳은 지금의 직산향교 옆(직산읍 군서리 165번지 일원) 2730㎡ 부지. 한 향토사가는 “건립규모를 키워 마을주민들에게도 경제수익에 관여하는 관광지로 삼기를 주장한 바 있지만 소수의견일 뿐이었다.
온조사당은 세종실록지리지 직산현조에 ‘백제시조 온조왕의 사당이 직산현의 동북쪽 사이 5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고 1429년(세종 11년) 건립됐으며 왕이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문종실록에서는 1451년(문종1년) ‘백제의 시조묘가 오래되어 무너져 허물어졌으므로 소재지인 직산과 각 고을로 하여금 보수하도록 해야한다는 의견이 있어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1872년(고종9년) ‘열읍지도’에는 용안치 중간 산직촌(판정리)에 온조왕묘와 진왕정(進王井)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1975년 이 내용을 근거로 천안향토사학회는 용안치 산직촌을 답사해 옛 터를 확인했다. 1980년 천안향토사학회는 용안치 온조묘 터에 제단을 차리고 제향 치제일인 9월18일에 배향했다. 2010년 9월17일 세계대백제전 때는 위례산성에서 온조대왕을 제향하고 백제혼불을 채화했다. 또한 2010년 천안시는 직산 산직촌에 온조묘 재현을 추진했고, 2011년부터는 온조왕숭모회가 주관해 배향했다.
김성열 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장은 “온조왕 옛사당터로 추정되는 직산 산직촌 용안치 온조왕묘 터를 발굴·보존하고 온조대왕 제향제를 위례백제대전으로 품격을 높여 충남기념문화재로 지정·등록해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