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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씨알의농장 함석헌 선생

김성열 천안시 역사문화연구실장

등록일 2014년11월25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함석헌 선생님이 천안과 인연이 된 때가 1950년 6.25전쟁을 겪은 후 학교들이 정상수업을 할 수 있을 때였다. 1952년 어느 날 천안농업고등학교 金斗赫 교장을 방문하신 함석헌 선생님을 그야말로 생시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반갑고도 놀랍게 맞이하는 金容駿 교사가 있었다. 김두혁 교장은 함석헌 선생님이 운영했던 평양 송산농사학원 교수 동지이다. 김용준 교사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천안농고 교장의 초청으로 잠시 고향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김용준 박사는 천안 광제의원 김치수 원장님 장남이며 천안초등학교를 졸업한 천안사람이다.

평소에 존경하는 함석헌 선생님을 고향 천안에서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교장선생님 사택에 머무르고 계시는 함석헌 선생님을 가까이서 지극 정성으로 모시게 된 인연으로 개인관계가 깊이 맺어 졌다. 이때부터 평생 동안 김용준 박사는 함석헌 선생님의 제일 큰 제자가 되었다.

함석헌 선생님은 천안농고 학생들에게 역사적인 방문기념 강연을 하셨다. 강당을 꽉 채운 학생들에게 나다니엘 호오존의 “The Great Stone Face" "큰 바위 얼굴”이라는 단편소설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념비적인 말씀을 해 주셨다. 1962년 함석헌 선생님이 미국 국무성 초창으로 미국에 오셨다. 워싱턴 D.C에 미국표준연구소 기술훈련기획으로 파견되어 있는 김용준 박사가 함석헌 선생님을 또 가까이서 모실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께서 미국에 오시게 된 것은 당시 『思想界』11월호誌에 발표하신 “5ㆍ16 어떻게 볼것인가“ 라는 글 때문이었다. 국가란 이름 아래 나라를 도둑질해 가지고 있는 소수의 지배자를 향해 외치는 씨알의 소리 였다. 흰 수염을 휘날리며 사자후를 토하던 그 소리가 바로 빈들에 외치는 소리였다. 혁명군의 서술이 시퍼렇던 5.16쿠테타 직후인 1961년 사상계 11월호에 “신문이나 라디오에는 일체 이렇다는 소감 비평이 없다. 언론인 다 죽었나 죽였나”하며 5.16쿠테타를 주도한 군인들을 꾸짖으며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열변을 토한 그 씨알의 소리이다.

이 글을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의 문정관으로 있었던 핸더슨씨가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 국무성에 보고하였는데 국무성에서는 이 글을 접하고 군사혁명이 났는데도 이런 언론자유가 있을 수 있느냐라는 아이로니칼한 평가와 함께 함 선생님을 국무성에서 초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군사정부에서는 선생님 방미를 막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선생님을 초청해 놓고 보니 그렇게 준엄하게 군사혁명을 나무래 던 그 모습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국무성 한국과장과 만난 자리에서 “어떻습니까. 군사혁명정부는?”라는 질문에 “예 잘하고 있습니다.”라는 대답 뿐 이었다.

입추의 여지가 없이 모여든 워싱턴 디·씨의 약 500명 가까운 한국 유학생들에게 함 선생님은 政治의 政字도 그리고 朴正熙 장군의 朴字도 입에 담는 일이 없었다. 그들에게 던진 준엄한 말씀은 한국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핑계라도 있지, 너희들은 태평양을 건너와 이곳에 머물면서 왜 공부에 힘을 쓰지 않느냐 라는 꾸지람 뿐 이었다. 군사혁명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기대했던 청중들의 실망은 컸었다. 그래서 퍼진 루머가 『사꾸라』였다.

기자들이 너무도 궁금해서 선생님에게 질문을 했다. 한국에서는 군사정권을 그렇게도 준엄하게 비판하시더니 강연 중에는 군사정권에 대한 언급 한마디도 없으셨습니다. 선생님은 기자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나라 안에서는 얼마든지 국내정세를 비판해도 나라 밖에서는 나라 안에 있는 사정을 들추어 비판하는 것은 한국국민으로서는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었다. 선생님의 깊은 애국심은 국내외에 알려지면서 선생님의 높은 뜻에 감격하게 된다.

그 함석헌 선생님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하루아침 홀연히 귀국하였다. 마중나온 張俊河 선생과 더불어 革命公約을 어긴 당시의 군사혁명정부를 향해 외친 사자후는 이미 당시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김용준 박사는 40년을 멀리서 가까이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살다가 선생님 돌아가신 후 씨알의 소리 지(誌)를 속간하여 통권 96호에서 122호까지 내고 정간되었다. 속간의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씨알의 소리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이 때 함석헌 선생님은 천안 봉명동 도립병원 근래 천안의료원 자리에서 씨알 농장을 운영했다. 평소에 선생님을 지극히 존경해 오던 이발사 천안성결교회 鄭萬洙 장로가 과수원을 몽땅 기증하여 받으신 농장이었다. 천안 봉명동 씨알농장에는 한때 천안의 몇몇 젊은이들이 성경공부 모임을 갖고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다. 몇 해 안되어 도립병원을 세운다고 충남도에서 토지 수용령이 내려져 농장을 내 놓으시고 천안과 짧은 인연이 갈무리 됐다.

씨알농장 터 자리에 기념지표석이라도 세웠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수 십 년 지나고 있다. 고향을 북한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원성리에서 태어나시고 자란 사자섬에 두고 서울에서 돌아가셨다. 고향을 잃으신씨알의 소리 함석헌 선생님의 기념관을 천안에 건립한다면 선생님의 제2고향으로 민족사에 큰 기념이 될 수 있겠다.

선생님은 1901년 3월13일 출생 1989년 2월4일 88세에 천국에 가셨다. 선생님은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서 모셔졌다. 선생님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뜻있는 메시지를 전하러 광야에서 외치셨다. 우리나라의 역사의 뜻을 밝히고 이 민족의 시대정신을 깨우쳐 주시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1958년 사상계 6월호지에 “생각하는 백성이어야 한다.”를 발표하신 바 있다. 한 시대의 씨알의 소리 민중이 소리 “얼”이 살아 있는 “씨”들의 소리 양심의 소리는 우리 시대정신으로 전승되고 있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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