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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진상

<기고>김성열 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장

등록일 2014년07월28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1945년 8월24일 저녁 일제의 패망과 함께 참혹한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한국인 징용노무자 3700여 명을 태운 조선인 귀국선 우키시마호가 부산행 항로에서 벗어나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시 마이즈루만 안에서 원인모를 폭발로 침몰되어 생존자 900여 명 외 3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우키시마호 침몰에 대해 67년이 지난 오늘까지 ‘촉뢰설’, ‘자폭설’이 엇갈리는 가운데 일본 정부는 사건 진상 조사는 물론 사과와 배상을 거부하고 있다. 그동안 사건 피해 당사자들의 증언으로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한국정부는 일본과의 외교마찰을 이유로 진상조사 과업을 채택마저 꺼리고 있다.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회가 1995년 천안에서 결성되어 전국 피해자 합동증언대회와 폭침사건 전모 진상규명조사 촉구활동을 하고 있다. 진상규명회 (회장전재진)는 일왕의 부하인 오미나토 해군경비부 우가키 사령관과 도리우미 우키시마호 함장이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에서 수천명의 한국인 남녀노소에게 안전항해가 보장되지 아니한 우키시마호에 강제 승선시킨 부당승선죄와 부산항으로 와야할 우키시마호가 돌연 교토부 마이즈루만으로 회항한 항해 위반죄, 한국인 귀국선이었던 우키시마호 기관실 옆 창고에 폭탄을 장치하고 마이즈루만에 이르자 점화 폭파하여 2천명 이상의 한국인을 한꺼번에 학살한 해저수장 학살죄, 마이즈루만 바닷가에 밀려든 한국인 시신을 신원파악도 하지 아니하고 밧줄로 줄줄이 꿰어 묶어 타이라해병단 뒷산 골짜기에 매립한 시신 무단 매립 유기죄, 침몰한 우키시마호를 즉시 인양하지 아니하고 9년간 해저에 방치한 사체유기죄, 한국인 3000여명이 죽었는데도 524명만 죽었다고 사망자수를 조작한 죄, 그나마 사망자 524명을 연합군 사령관에게는 260명이라고 축소·조작하여 보고한 허위 진술보고 죄, 우키시마호 마이즈루만에 들어서자마자 일왕의 부하인 해군승무원들이 먼저 모선을 탈출한 생쥐도망죄 우키시마호 한국인 승선경위, 출항경위, 승선자수, 입항경위, 침몰원인, 사망자수, 생존자수, 실종자수, 사체 처리 등을 대한 진상규명하지 아니하고 사체유기, 배상외면 등 사후처리 부당죄 등을 인류의 양심으로 단죄하고 있다.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의 전반적인 문제를 간추리면서 승선자수를 추산해 보면 우선 미사와비행장 해군11, 12, 13부대에 부임한 인원, 가바야마비행장에서 일한 10개 중대 규모, 인원, 해군23부대에서 일한 인원, 2개 국영기업체와 11개 민간토건업체에서 일한 인원 등으로도 승선자수가 8200여 명에 육박한다. 출항에 앞서 페인트를 칠해 배 이름을 지웠고 기관실 옆 창고에 자폭장치를 부착했다는 증언이 오미나토 해군공작부 조기과에 근무하던 보일러공이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8월21일 승선을 완료하고 22일 오후 10시에 출항했다. 무츠만을 빠져 나온 우키시마호는 애초부터 부산항을 향하지 아니하고 일본 해안선을 따라 남하했다.

해군승무원 대부분이 양주에 취해 있었고 자신들의 소지품을 바다에 건져 버리는 일이 빈번했다. 승무원들은 한국인들에게 “너희들이 오늘을 무사히 넘기면 이 물건을 주는 것이 어찌 아깝겠는가!” “가다가 적을 만나면 싸워야 한다. 뒤에 폭탄도 많이 실었다.” “태어나 피워보지도 못하고 사라지겠구나!” “이 배는 가다가 어디론가 들어간다.”는 등의 언행을 서슴없이 죄다 토해냈다.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만으로 항진해 들어갈때 이미 소해완료라는 신호를 받고 입항했다. 이 배는 처음부터 부두 접안을 시도하지 아니하고 헤비지마와 도리시마 사이 해상에서 멈춰섰다. 배가 멈춘 뒤에 해군승무원들은 구명보트를 내려 타고 모선을 탈출했다. 해군승무원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뒤에 폭발소리가 났고 곧이어 두번째 폭발음이 났고 배는 가운데부터 꺾이면서 침몰했다. 일부 승무원들은 갑판위에서 한국인을 구조하였다기보다 오히려 사람이 매달려 있는 로프를 칼로 잘라 더 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 임시로 설치한 나무사다리가 부러져 선실 아래층에 있던 사람들은 나오지 못하고 용솟음치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바다는 온통 중유로 덮였고 뱃기름을 뒤집어 쓴 사람들은 눈만 뒤룩거리다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인근 어촌마을에서 거룻배를 몰고 구조에 나섰으나 그 배마저 뒤집힐까 하여 물에 빠진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피하면서 겨우 구조했다. 살아난 사람들은 밤길을 걸어 마이즈루 타히라해병단에 임시 수용되었다. 그날 밤 임시수용소 2층에서 또 한번의 미증유의 폭발이 일어나 부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마이즈루 바닷가로 가족을 찾아 나섰으나 시신이 뱃기름으로 덮여 얼굴을 알아볼 수 없어 가족을 찾지 못했다. 이때 해군들은 시신을 밧줄로 줄줄이 엮어 바닷가에 묶어 맸다. 마을 사람들은 긴 장대와 갈퀴를 들고 나와 바다에 떠 있는 가방과 보따리를 끌어내 속에든 돈을 챙겼다. 그들은 비겁하게 부자가 되어 마을에서 얼굴을 들 수 없었으므로 고향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참으로 희비가 엇갈리는 비극적인 참사였다. 이같은 대 참사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침몰원인을 조작했고 사망자수를 축소 발표했을 뿐 성의없는 무책임한 작태로 일관하고 있다.

우키시마호 폭침진상규명회가 조사·분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침몰원인으로 미군이 투하한 기뢰에 닿아 폭발·침몰했다고 발표했지만 촉뢰가 아니라는 과학적 논리가 성립된다. 기뢰는 감응기뢰, 음향기뢰, 부유기뢰라는 성상과 기전으로 폭발한다. 감응기뢰는 수압이나 직접접촉으로 폭발하고 음향기뢰는 기관소리 즉 음파의 세기로 폭발하고 부유기뢰는 수중에 떠 있으면서 부딪쳐 폭발한다. 우키시마호가 폭파되어 침몰할 때는 배가 완전히 멈춰 서 있었기 때문에 위 세 성상 기뢰는 폭발 기전에 맞지 않는다. 마이즈루만에 미군이 투하한 기뢰가 다수 있었다고는 인정되지만 배가 완전히 멈춘 상태에서 225명의 해군승무원이 구명보트를 타고 모선을 다 빠져 나간 뒤에 ‘촉뢰’란 있을 수 없다. 배가 멈춘 상태에서 수압이 작용하지 않고, 기관소리도 없어 음파반응이 일어나지 않고, 직접 접촉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군이 투하한 기뢰에 부딪쳤다는 근거가 없으며 선체 파괴상태로 보아도 선체 내부에서 폭발했음이 밝혀졌다. 특히 한국인 일본헌병 미나미는 마이즈루에 당도했을 때 기관실 쪽으로 늘어선 전기줄을 발견하고 이를 끊으려 했으나 도구가 없어서 끊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촉뢰가 아닌 폭발물에 의한 폭파침몰이다.

두 번째로 사건을 철저하게 은폐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사망자 수가 터무니없이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가라앉은 배의 선실에 몇 명의 한국인이 숨죽이고 있었을까? 이는 감출 수 없는 자연현상 그대로였지만 GHQ도 사건 은폐에 합류했다. 배를 인양하지 아니하고 사망자를 524명으로 발표한 점, 도리우미 함장이 GHQ에 사망자를 260명이라고 축소·조작하여 보고한 점, 침몰한 우키시마호를 인양하여 조사하지 아니하고 일주일만에 사건을 종결한점, 재일조선인연맹이 제소한 소를 정당한 이유 없이 기각한 점 등은 모두 가해국 일본과 GHQ가 국제사회에서 불리해 질 수 있는 정황이었으므로 은폐했다.

이 문제는 미국이 전후처리 과정에서 패전국인 일본과 동조했다는 사실로 확연히 드러났다. 대형전범인 미치노미아 히로히토를 사형에서 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후처리의 부당성은 피해자의 인권을 짓밟았다는 점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특히 사후처리 부당성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남겼다. 첫번째 문제는 침몰한 배를 즉시 인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선실 안에는 죽은 사람이 몇 명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인양조사도 아니하고 사망자 수를 발표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번째는 다음 날 바닷가에 밀려든 시신을 신원 파악 없이 밧줄로 줄줄이 엮어 맺고 기름을 붓고 태워 산골짜기에 무단 매립했다는 점이다. 이밖에도 특히 주목해야 할 만행은 9년 뒤에 해저에 가라앉은 선체를 인양하고자 할 때 일본 조선우호협회에서 유골을 원형 그대로 인양할 수 있는 방법을 요청했으나 이를 묵살하고 선체를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하여 인양했다는 점이다. 이같은 처사는 또다시 사망자의 인권을 짓밟은 것이며 사망자수를 완전히 무시한 행위였다. 그나마 인양한 유해로서 남녀노소를 구별할 수 있었으나 이 또한 무시하고 유해를 합쳐 태워 9년 전에 524명이라 발표한 숫자 맞추기에 급급했다. 9년전 524명과 9년 뒤에 인양한 348명을 합쳐서 872명이라고 다시 수정하여 발표하지 않았다. 또한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으나 67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정부는 두 눈을 딱 감고 있다. 이같은 일련의 교만한 태도가 지금까지 계속돼 오고 있다. 천안사람들 열명이 이 사실을 살아서 증언한다. 강태철(광덕면), 임창문(광덕면), 지홍석(광덕면), 이철우(광덕면), 최수강(광덕면), 정기영(광덕면), 고종환(광덕면), 오희용(광덕면), 원종봉(광덕면), 전우영(광덕면)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 사실로 증언해야하는 사명이 우리시대 정신이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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