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왕 사당 조감도.(왼쪽은 직산향교)
천안시가 13억원을 들여 온조왕 사당을 건립중에 있다. 예전부터 지역향토사가들이 사당 필요성을 제기해오던 바, 시는 백제 첫 도읍지인 직산에서 백제시조 온조왕을 숭모하고, 직산초도설을 통한 천안의 정체성을 확립하겠다는 구상이다.
17일 오후 4시 천안시청 중회의실에서 온조왕 사당건립에 대한 ‘설계용역 최종보고회’를 가졌다. 이날 용역을 수행하고 있는 ㈜춘추건축사사무소는 사당, 삼문, 화장실 등 건축물 배치계획과 76.14㎡의 건축설계, 조경계획 등을 설명했다.
시는 온조왕 사당터로 직산읍 군서리 165번지 일원 2730㎡의 부지를 택했다. 옛사당터로 추정되는 인근 산직촌 용안치가 가장 적합하나 군부대의 영향아래 있어 차선택을 택했다.
현재 추진될 사당은 51.30㎡ 규모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ㅡ’자형 맞배지붕형식으로 건립하고 정면 3칸, 측면1칸의 삼문(10.26㎡), 화장실(14.58㎡) 등을 건축하게 된다.
온조사당은 세종실록지리지 직산현조에 ‘백제시조 온조왕의 사당이 직산현의 동북쪽 사이 5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고 1429년(세종 11년) 건립됐으며 왕이 봄과 가을 두차례에 걸쳐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문종실록에서는 1451년(문종1년) ‘백제의 시조묘가 오래되어 무너져 허물어졌으므로 소재지인 직산과 각 고을로 하여금 보수하도록 해야한다는 의견이 있어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천안시 문화관광과 곽영수씨는 이번 온조왕 사당건립에 대해 “정유재란(1597년)때 소실된 것을 417년 만에 다시 건립하는 것으로, 온조왕이 BC 18년부터 BC 5년까지 13년간 최초로 도읍을 정하고 찬란했던 대백제 700년 역사의 서막을 연 천안의 역사적 정체성을 재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주재석 문화관광과장은 “온조왕 사당 건립은 천안이 백제 초도로 인식했던 조선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실증적 자료로, 후세에 알리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게 됐다”고 밝혔다.
시는 이번 최종 용역보고회에서 천안시와 자문위원들이 제시한 의견을 반영해 최종설계를 확정, 공사를 착공하고 오는 8월 완공목표로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천안역사문화연구실 ‘온조왕묘터 발굴·보존해야’
천안역사문화연구실(실장 김성열)에 따르면 백제건국 시조 온조왕의 시조를 모시는 묘우가 586년만에 직산에 재현된다. 비록 옛터로 추정되는 산직촌 용안치 온조왕 사당터에 옛모습대로 복원되지는 못하지만 가까운 직산향교 옆에 자리잡게 됐다.
1872년(고종9년) ‘열읍지도’에 용안치 중간 산직촌(판정리)에 온조왕묘와 진왕정(進王井)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1975년에 천안향토사학회는 용안치 산직촌을 답사해 옛 터를 확인했다. 1980년 천안향토사학회는 용안치 온조묘 터에 제단을 차리고 제향 치제일인 9월18일에 배향했다. 2010년 9월17일 세계대백제전 때는 위례산성에서 온조대왕을 제향하고 백제혼불을 채화했다. 또한 2010년 천안시는 직산 산직촌에 온조묘 재현을 추진했고, 2011년부터는 온조왕숭모회가 주관해 배향했다.
김성열 실장은 “온조왕 옛사당터로 추정되는 직산 산직촌 용안치 온조왕묘 터를 발굴·보존하고 온조대왕 제향제를 위례백제대전으로 품격을 높여 충남기념문화재로 지정·등록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학수 기자>
<김성열 역사문화연구실장 칼럼>
고구려·대백제 국모 ‘소서노’ 설화
부여국 해모수와 유화의 아들 주몽은 졸본부여에서 召西奴(29세)라는 부호 과부를 만나 그녀의 기반으로 첫도읍지를 서성산(西城山)에 정하고 BC 37년에 나라이름을 옛 부여의 국명이었던 ‘고구려’라 하였다.
소서노는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새 남편인 청년영웅 주몽(22세)을 도와 새 나라를 건설했다. 소서노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비류를 주몽과의 재혼으로 온조를 낳았다. 따라서 그녀는 고구려의 기초가 점차 튼튼해져감에 따라 주몽대왕의 후계자는 비류나 온조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당연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BC 19년 뜻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했다. 주몽은 동부여를 떠날 때 예씨녀(禮氏女)와 혼인하여 유리라는 외아들을 두었었는데 주몽대왕(41세) 재위 19년 때에 돌연 동부여로부터 예씨부인과 유리가 나타난 것이다. 이에 주몽대왕은 크게 기뻐하고, 유리를 태자로 임명했다. 소서노의 낙심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같은 해 9월 마침내 주몽왕까지 붕어하자 소서노는 고구려에서 더이상 머무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개척정신이 강한 소서노는 비류, 온조 두 아들들을 불러 고구려에서는 그들의 입지가 없음을 설명하고 새 땅을 찾아 나설 것을 설득했다. 소서노가 유리대왕에게 그 뜻을 말하니 마침 미안하게 느끼고 있던 유리대왕은 소서노와 그녀의 두 아들 일행에게 재물을 넉넉하게 나누어 주며 출발을 허락했다.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 두 아들과 마려(馬黎), 전섭(全聶), 조성(趙成) 등 10명의 신하를 데리고 고향인 졸본부여에 들려 자신들의 추종자들을 더 확보한 후 대선단을 꾸려 졸본부여로부터 남하해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다. 항해 후 대선단이 표착한 곳이 아산만 주변 밀두리(메주골)였다. 이곳에 상륙한 비류·온조 형제는 도읍지를 물색하여 안성천(하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마침내 그 상류인 용인 부아산(負兒山)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부아악에 올라 둘러보니 북쪽으로 한수를 띠로 하고, 동쪽으로 높은 산에 의지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기름진 들판이 바라보이며, 서쪽으로 큰 바다로 막혀있다. 이러한 천혜의 요새로 된 땅이야말로 얻기 어려운 지세라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 BC 18년에 백제국을 건국하고 수도를 위례성(慰禮城)이라 했다.
여기서 비류와 온조는 수도의 입지에 관해 견해가 달라진다. 비류는 밀두리가 바다 조수가 내륙까지 깊이 들어와 통상이 유리한 항구의 이점을 가지고 있어 수도로써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양 세력은 결국 분립하게 된다.
한편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했으면서도 고구려를 떠나야만 했던 여걸 소서노는 자신의 소생들인 비류와 온조마저 화합하지 못하는 괴로움이 컸다. 분립의 원인은 왕도를 정하는 문제였지만 사실은 소서노가 첫 남편에게서 낳은 비류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졸본부여의 토착세력이었고, 소서노와 주몽 사이에 태어난 온조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한때 주몽을 추종했던 이민 세력이었을 것이다. 이 두 세력간의 주도권 다툼이 분립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소서노 일행이 양분된 후 그녀는 참담한 마음을 억누르고 장자인 비류를 따라 메주골로 갔다. 그런데 BC 6년에 소서노는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온조의 측근들을 제거하기 위해 비류측의 장군 5명을 대동하고 남장한 채 위례성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온조군은 남장한 왕모(王母)를 알아보지 못하고 침입한 비류군의 장군들과 함께 살해했다.
‘삼국사기’는 이 부문을 오호입성(五虎入城)이라 하고 ‘왕도에서 늙은 암여우가 남자로 바뀌고, 다섯오랑이가 위례성에 들어왔다. 왕모가 61세로 죽었다’라 적고 있다. 결국 왕모 소서노가 시해된 후 BC 5년에 온조 세력은 지금의 광주(廣州)로 수도를 옮긴다. BC 2년에야 소서노는 비류 백제측에 의해 국모로서 제사를 지내게 됐다. 이는 아마도 온조 백제측에 의해 암장된 후 4년 뒤에야 그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한 여걸 소서노는 그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이 때문에 백제의 시조를 소서노로 보기까지 한다.
1980년대부터 대백제국모 소서노 제향이 천안향토사계 주관으로 추진해 오고 있다. 금번 4월에 뮤지컬 소서노가 천안문화재단 (공동)기획으로 서울과 천안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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