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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의 만세운동들

김성열 천안시 역사문화연구실장 기고칼럼

등록일 2014년03월11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목천학생 만세운동

공주 천안지역 감리교 감리사 윌리암 선교사와 천안읍 감리교회 안창호 목사는 선교활동을 체계적으로 하고 있으면서 민족독립정신을 계몽해 왔다.

모든 조직을 움직이는 중심은 천안읍감리교회 담임 안창호 목사가 그 위치에 있었다. 안창호 목사는 지리적 중심지인 천안읍 사직동에 위치하고 있어 감리교천안지방을 감리지도하면서 중심 역할을 했다. 안창호 목사는 인천내리교회 학교 교사와 윌리암 선교사 통역 전도사에 이어 이미 공주읍교회 담임 목사를 역임한 예비된 중심인물이었다.

천안지역에서도 가장 빠르게 발전된 병천면과 인접한 수신면은 당시까지 서울에서 장호원, 진천, 병천, 수신, 전의, 공주로 이어지는 교통이 활발한 곳이었다. 이미 자리잡은 병천 지령리교회(1898) 감리교 선교사와 성공회 병천교회(1908) 성공회 선교사들의 왕래로 교회와 학교는 개화 개명 바람으로 눈에 띠게 발전되고 있었다.

제일 먼저 일어날 수 있는 곳이 목천이었다. 감히 누구도 목천 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리라 생각할 수 없었다. 어린학생들이라 가볍게 생각했으며 일인 교장·교사들이 감시하고 있으며 더욱이 학교옆 건물이 헌병주재소였다. 이미 거사는 극비리에 준비되고 있었다. 수신 장명학교와 병천 진명학교 교사인 김구응 선생은 목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제자들과 연락되고 있었다.

목천 보통학교 전교생 169명 중에 수신, 병천 제자들이 많았다. 중심 인물 이었든 이규태 학생이 상해임시정부에 도착하여 보고한 내용을 기록한 비밀문서들이 공개 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목천 보통학교 학생 독립만세운동은(3/14) 김소용, 이규태가 주동이 된 거사라는 것이다.

김소용, 이규태는 김구응 선생 제자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두 학생은 병천, 수신이 당시 현 주소이면서 목천보통학교에 입학했고 자손들과 동네 어르신들의 전하는 말에 따르면 당시 진명학교와 장명교회의 학교를 다녔다는 것이다. 목천공립보통학교에 당시 학적부가 없어서 확인할 수는 없으나 다른 학교에서 볼 수 있듯이 공립보통학교 입학 서류를 보면 모두가 서당 인근 사립학교를 수료한 수학능력 있는 자가 입학하고 있다.

일제에 의해 압수 보관된 상해임시정부 비밀문서 속에서 밝혀진 목천학생 만세운동의 주동 인물이 김소용, 이규태라는 기록은 많은 사실을 유추할 수 있게 됐다. 목천학생들의 만세운동은 김구응 선생과 한태유 목사의 지도하에 김소용, 이규태 학생이 중심이 된 거사였다.

목천만세운동에서 일제 헌병의 끈질긴 조사로 김소용, 이규태 학생들에 의해 김구응 선생이 배후 지도자로 밝혀졌으면 병천만세운동은 큰 차질이 생겼을 것이다. 중심 학생들은 끝내 배후 지도자 들을 발설하지 않았다. 김구응 선생은 마침내 4·1 병천 장터만세운동 거사에서 일제 총칼에 순국하게 된다.

목천학생운동은 일제의 허점을 찌른 통쾌한 성공적 거사였다. 극비리에 준비 마련한 처음 보는 태극기를 손에 손에 들고 생전 처음 외처보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목이 터져라 외치고 외처 끝내 목이 메어 울부짖는 학생들의 만세거사였다. 친일유지들이 감히 예측할 수 없는 허점이 찔린 19세 내외 학생들만 참여한 학생만세 거사였다.

학교를 출발한 169명 학생들은 앞장선 이규태, 김소용 학생을 따라 장터를 지나 면사무소 앞에 이르렀을때 당황한 일제 헌병들은 총검을 휘두르며 해산시키기에 바빴다. 앞장선 몇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일제 헌병들은 주동 조종자를 탐문조사를 서둘러 됐다. 모두가 자기들이 주동자라고 할 뿐 시원한 배후 조종자를 밝혀낼 수 없었다.

목천학생운동은 중심인물인 이규태, 김소용 등을 체포하여 조사했으나 당시 목천 군수 이범신 선생의 영향력으로 더 확대조사하지 않고 훈방 조치됐다. 이규태 학생은 끈질기게 계속되는 감시와 배후자 추궁에 시달려야 했다.

전하는 말에 이규태 학생 아버지는 나귀타고 다닐 만큼 동네에서는 경제적으로 살만한 정도였다. 이규태 학생은 독립운동의 큰 뜻을 가지고 얼마간의 독립운동 자금을 몸에 숨기고 상해임시정부에 도착했다, 어린나이에 바다건너 상해까지 가는 길은 가슴 벅찬 길이면서 갖은 고난의 길이었다.

상해임시정부에 도착하여 목천학생만세 상황을 보고한 이규태 학생은 훈련대에 입대하여 활동하였으나 병을 얻어 어쩔 수 없이 귀국하였다. 김소용 학생은 감시와 배후 조종자 추궁에도 끝내 발설하지 않고 교회와 학교에서 봉사하며 김구응 선생을 비밀리에 도와드렸다.

목천, 입장, 천안, 병천만세 거사 의거로 살벌한 여론은 차츰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철저한 감시에 눈초리는 계속되었다. 병천장터만세 거사로 순국하신 김구응 선생과 유중권 선생의 소식을 들은 이규태는 울분으로 치를 떨었다. 이규태, 김소용 학생은 숨 죽여 은거하면서 감시의 눈초리만 피하여 영농에 힘을 쏟았으며, 교회학교에 봉사하는 신앙생활이 전부였다.

이규태, 김소용 학생은 목천공립보통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여 졸업장을 받을 수 없었고 후에 전수 받을 수 있었다. 이규태는 5회(제65호)로 졸업장을 김소용은 4회(제99호)로 전수하였다. 그리고 천안만세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2005년에 정부에 서훈 추서하여 늦게나마 두 분 가족들에게 대통령 포상을 전수하였다.

다만 상해임시정부까지 가서 활동한 사실을 인정받아 이규태 선생의 훈격을 더 높여 드리지 못해 아쉬웠다. 또한 목천만세운동 참가 학생 가족들 모두에게 정부포상을 추서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목천초등학교 운동장에 기념비가 돋보인다.

 

입장 만세 운동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면서 전국으로 확산된 3.1독립만세운동의 불꽃은 천안군 입장면 광산촌에도 점화되었다. 입장지역 만세거사는 양대교회 광명여숙 어린여학생들이 주동한 입장장터 만세운동 거사(3월20일)와 광부들이 갈망해 온 조국독립의 염원의 불길이 양대 광부만세 거사(3월28일)로 타오르게 된 것이다.

광부들은 일제의 금광 수탈로 배일 감정이 남달리 강하였던 까닭으로 광명여숙 학생거사에도 참여 하였고, 광부들만이 합심하여 만세거사를 일으킨다. 광명여숙학생들은 평소에 조종범 목사, 강기형 선생, 임영신 선생, 함태영 변호사, 정재관 목사, 의사 김희영으로부터 민족독립정신을 교육받아왔다.

민족독립정신은 마침내 입장 양대 광명여숙학교 학생들에게 불이 붙었다. 입장장터만세운동 주동 학생들은 민옥금(민원숙), 황현숙(황금순), 한도숙(한이순)이었다.

3월20일 입장 장날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하고 주동자들은 목사님과 교사들의 지시와 지도 묵인 아래 준비를 극비에 몇 날을 지냈다. 생전 처음 보는 태극기를 그리면서 어린 학생들은 흥분을 감출 수 없이 들떠 있었다. 나라가 망했으니 상복으로 흰옷을 모두 입기로 하였다.

망국을 서러워하고 독립을 갈구하는 뜻으로 상복을 입으니 입장시장 통에 몰려든 민초들의 마음을 이끄는 데는 충분하였다. 두렵기도 한 어린 학생들은 강기형 선생, 조종범 목사의 기도로 용기를 얻고 서로 부둥켜안고 담대한 결행에 도움을 하나님께 간구하기도 했다.

입장, 양대, 직산교회에도 알리고 동네마다 뜻 있는 어른에게 알리고 광부들에게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고 연락이 되었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여드는 장날 3월20일 정오 12시에 마침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면서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나라 잃은 울분과 원통으로 한 맺혀진 입장, 양대 민초들과 학생들의 목소리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음 이었다.

모여든 민초들은 셈하여 2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뒤늦게 달려온 천안주둔 일제 기마대 헌병들이 마구 잡이로 몽둥이로 패고 말발굽으로 짖 밟으며 총칼을 휘둘러 해산시키려 했다. 주동학생들은 체포되어 주모 조종자를 밝히라는 심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구두 발로 차이고 물고문까지 받아 가면서 끝내 발설하지 않았다. 주동학생 민옥금(민원숙), 황현숙(황금순), 한도숙(한이숙)은 1년2개월 징역형을 받아 공주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1년 만에 풀려났다. 광명여학교 교사 강기형 선생(2년), 광부 안시봉(1년), 김병열(6월), 김채준(6월), 조쌍동(6월) 선생이 실형을 받았다.

이들의 재판기록에서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조종범 목사, 이근섭, 이장한, 정재관 목사 그리고 윌리암 감리사의 조종으로 이루어진 애국만세거사임을 부인할 수 없다. 입장장터만세운동거사도 교회 교역자, 교인, 교사, 학생들이 궐기한 자랑스러운 믿음의 실천이었다.

광부노동자들이 거사한 만세운동은 27일에 박창신 집에서 박창신, 안은, 한근수 등 같은 광부들이 모여 결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면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평소에 광부 노동자들이 품고 있던 배일 원한과 울분이 20일에 있었던 입장장터 광명여숙 학생들 만세운동 거사에 자극을 받아 불이 옮겨붙은 것이다.

28일 아침 광부 교체시간을 이용하여 모두 함께 모여서 독립만세를 외쳐부를 것을 결의하였다. 마침내 광부 노동자들 2백여 명이 호응하여 태극기를 나누어 갖고 입장장터로 향해 행진하였다. ‘조선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치면서 태극기를 흔들어 입장장터 민초들의 합력을 촉구하며 행군은 계속 하였다.

입장장터에 모여든 민초들도 함께 만세를 외쳤다. 평화롭게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군하든 광부들을 저지하기 위해 급하게 달려온 일제 헌병들과의 격렬한 충돌로 인하여 무자비하게 유혈난타를 당하였다. 이에 광부 노동자들은 흥분되어 일제에 보복할 행동대로 변하여 양대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무기를 탈취하려 시도하는 한편 전화선을 절단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일제와의 충돌로 현장에서 신일성(광부), 남기철(광부), 김모(?)(광부)는 순국하였다.

주동하여 앞장섰던 학생 3명, 광부 7명, 교사 1명, 교인 1명은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으나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았고 실형을 받았다. 배후 조종자 추종은 발설되지 않아 더 이상 확대되지 않고 일단락되었다.

재판기록이 정확하게 남아있어 실형 내용은 사실대로 알 수 있으나 신원이 확인되지 않고 순국한 광부 3인은 신원이 확인되지 못해서 서훈받지 못하고 있다. 광부들은 외지에서 근거 없이 광부 노동자로 노무생활하였으므로 신원이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체포 구금되어 조사받고 기소중지된 인사는 19명이다. 만세운동에서 일제 헌병들 총칼에 상처 받은 환자들은 입장병원 김희영 원장이 치료를 했다. 김희영 원장은 공주형무소에 끌려가 고문으로 얻은 병으로 다음해에 순직한다. 천안입장에 첫 한국인 의사(세브란스의전 1회 졸업)였다.

천안지방 감리사 윌리암스 선교사는 연회에 담음과 같이 보고했다. 천안 북구역은 회당 3, 기도실 1개 인데 독립운동의 소요로 인하여 수년간 예배를 정지할 뿐더러 주재 목사가 만주로 떠나가서 곤란하더니..............(생략)

거사 후 파괴된 교회들을 수습하려는 조종범 목사는 일제로부터 엄중한 감시 사찰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만주로 망명하게 된다. 그때 직산군 지역, 입장면 광산지역은 일제 침략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수탈당하게 된다. 약소민족 나라 잃은 백성들의 뼈아픈 한이 하늘에 사무쳤다.

 

천안읍내 장터 만세운동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어 천안정거장이 건축되고 천안 정거장 중심으로 새 동내가 들어섰다. 1904년 천안우편소가 개통되어 전화가 가설되며 신식상가가 들어섰다. 큰 재빼기에 일본인 상가가 새로 서고 신기한 상품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변두리 인구가 신식동네로 모여 들었다. 안서동 금광이 개발된 지역에 노동품팔이 노무자들이 모여들고 금광기술자로 미국인, 일본인들이 드나들었다. 천안읍내 큰 시장은 인근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3일장 큰 장으로 알려졌다. ※음력 3일과 8일 장날

천안읍내장터만세는 희생자가 많은 사건으로만 알려져 왔다. 천안읍내장터만세는 주모자가 체포됐다고는 하나 끝내 주모자가 밝혀지지 않았다. 천안읍내장터만세는 뚜렷한 지도자 없이 자발적으로 민중들이 모여 만세 무른 평화시위운동으로 보였다.

우리고장 천안읍내장터만세운동의 기록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나 차츰 자료들이 모여졌다. 지금까지 1945년 해방 후 목격자 상대로 수집하여 부분적으로 파악 되었고 관계되는 재판기록이나 독립운동사, 보도자료, 개인소장 자료 등 추적하여 파악되었다.

일본 조선주둔 헌병사령관이 육군대신 앞으로 보낸 전문에 의하면 “3월 28일 천안에 일천내지 삼천의 폭민이 소요를 일으켜 헌병대의 출동으로 겨우 진압하였다” 또한 “천안면에 이100여명이 소요하여 곤봉 등으로 폭행함으로 경찰이 발포하여 해산하였다. 소요를 일으킨 저들에게 사상자가 있었다.” 그리고 “3월 29일 삼천여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다가 26명이 체포되었으며 그중 이문현, 허 병, 최오득, 인시봉 등을 구속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고 보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보고내용을 보아 천안면 읍내리 읍내장터만세운동은 3차에 걸쳐 연속 만세운동으로 계속되었다.

천안읍내장터만세운동은 주동한 인물이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하여 노출되지 않았다. 천안읍내 안서리 지역 금광 광부들이 희생자가 많았으나 신원이 밝혀지지 않고 증거가 인멸된 것으로 추측된다. 3월27일 밤 입장, 직산 금광 광부들이 인근헌병 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거센 시위로 5명이 사살된 사건이 있었다. 4월 19일자 매일신보 기사로 보아 천안읍내 금광 광부들도 천안읍내 장터에서 28일부터 29일에 이르기까지 연속 거센 만세운동으로 희생자가 많았다고 추측된다.

당시 26명이 체포되었으나 4인만 재판에 회부된 사람의 기록으로 남아 있으나 옥중에서 죽었거나 총살된 사람은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채 매장된 이가 많이 있었다고 본다. 천안에서 여러 날 친일권세가의 집을 습격한는 등 거센 항일시의로 희생된 이들은 금광 광부들로서 신원을 알 수 없어 오늘날까지도 그 진상을 확인할 수 없다.

재판에 회부되어 기록에 남아 있는 이문현(37 봉명리), 허 병(36 구성리), 최오득(35 미죽리), 인시봉(28 읍내리) 선생은 신원과 후손들이 밝혀졌으나, 이문현 선생은 광부라는 신원뿐 본적, 주소도 알 수 없고 후손들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신원을 알 수 없는 광부 희생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천안읍내장터만세운동은 이렇게 연일 몇 날 계속되므로 피살자들도 많았는데 그들의 신원을 밝혀낼 수 없어 값진 희생이 선양 현창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천안읍감리교회(서릿말) 안창호 목사와 그 성도들은 천안을 중심으로 그 성도들은 천안을 중심으로 그 주위 지역에 확산시키는 역할은 물론 배후 조종운동 주동자였다. 천안읍감리교회는 병천, 양대, 전의, 풍세, 환서, 성환, 직산, 공주, 아산 등 지교회의 중심교회였다. 그 천안지역의 주도면밀한 주동인물은 안창호 목사와 교인들이다.

천안읍내 제일 첫번째 교회 감리교 ※읍내교회(사직동 서릿말 151)에 1916년에 부임한 안창호 목사는 독립운동만세 천안지역 주모자로 예비된 사역자였다.

※천안제일감리교회 옛 교회– 1948 문화동 109에 신축

2008 풍세로 708 하늘샘교회 신축 이전

이미 1909년에 공주교회에 전도자로 파송되고 정식 목사로 공주교회 담임(1912~1915)하면서 천안지방 순회 부흥집회를 주관했다. 1917년 천안읍교회를 건립하고 담임을 맡으면서 천안읍내와 천안지방 순회 선교에 큰 성과를 일으켰다.

천안지방 윌리암 감리사(1916~1920)는 천안을 중심한 아산, 연기, 음성 등지의 교회를 돌아보는 한편 충남일대의 교회까지도 순행하면서 돌보았다.

충남 일대 만세운동 주동인물로 천안읍교회 안창호 목사와 공주교회 현석철 목사도 후에 체포되어 공주감옥에서 6개월 옥살이하고 1919년 8월29일 윌리암 감리사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안창호 목사는 1993년에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천안만세운동기념사업회는 늦게나마 2003년에 인시봉, 최오득, 허병, 이문현 선생을 정부에 서훈 추서하여 애족장을 서훈하였다. 그러나 이문현(광부) 선생의 애족장은 가족이 파악되지 못해 서훈이 유보되었다. 신원을 알 수 없어 서훈받지 못한 선열님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우리시대 정신으로 전승·선양해야 한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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