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뉴스등록
맨위로

천안시명(天安市名) 연혁 '통합도 쿨하게'

김성열 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장

등록일 2014년01월10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천안시 승격 50년을 지낸 첫해를 맞으면서 천안군·목천군·직산군 연혁을 살펴본다. 삼한시대(BC200)에 마한(馬韓)국 중심에 있던 우리고장 지명은 금북정백(차령산맥)에서 갈려 동쪽은 대목악군(大木岳郡), 북쪽은 위례성(違禮城), 남서쪽은 도솔(兜率)땅이라 일렀다. 다시 위례성(慰禮城 BC18)은 사산현(蛇山縣 687), 직산현(稷山縣 940), 직산군(稷山郡 1396)이 되었다.

대목악군(大木岳郡 389), 목천군(木川郡 1892)은 대록군(大麓郡 757), 목주(木州 940), 목천현(木川縣 1413), 목천군(木川郡 1895)이 됐다. 그리고 도솔(兜率)땅 지역은 고려 태조가 천안부(天安府 930)를 건치(建置)하였다. 그러나 천안은 지방명칭으로 외람되다 하여 환주(歡州 995)로 개명하였으나 천안으로 환원(1018)되었다가 영주(寧州 1310)로 개칭, 다시 천안으로 개칭(1361)되고 또 영산군(寧山郡 1413)으로 개명되었으나 끝내 천안군(天安郡 1416)으로 환원·개명되었다.

천안이 아닌 이름으로 세 번씩이나 고치려다가 오래가지 못하고 천안으로 환원하였다. 천안 사람들이 천안이라는 이름을 지키려고 많은 애를 쓴 흔적이 보인다.

1914년 일제하에 천안군, 직산군, 목천군이 통합되어 천안군으로 개편되었다. (일제 총독부령 제111호 3/1) 1963년에 법률 제1176호(1/1) 천안군, 천안읍과 환성면이 합하여 천안시(天安市)로 개편·승격되면서 천원군(天原郡)이라는 이름으로 분리되었다.

천원군으로 명칭을 정한 까닭은 별다른 유서(由緖)가 있어서가 아니라 군명과 시명이 동일하면 혼동이 온다는 이유로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매우 엉뚱한 이름을 부칠 수는 없어서 천안의 천자를 따고 이웃에 중원군(中原郡), 청원군(淸原郡)이 있으니 그 예에 따라서 원(原)자를 부쳐 천원군(天原郡)이라 하였다.

천원군 지명은 30년동안 천안시민과 천원군민들에게 푸대접을 받아왔었다. 익숙하지 않고 그리 호감이 가지 않았으며 많은 혼동을 가져왔다. 군명은 예부터 내려오는 유래를 따라서 짓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지명을 관장하는 행정부에서 행정편의적 착상에서 동일지명은 쓰지 않기로 관례를 세웠으며 군 명칭 변경은 단일 법령으로 제정해야 하기 때문에 쉽게 고치기가 어려웠다.

천안군은 유서도 역사도 없는 명칭으로 행정편의 이상의 뜻을 찾을 수 없어 애향인사들이 아쉬움을 표시하였으나 내무부의 권위를 꺾지 못하였다. 때마침 안동군·안동읍이 시로 승격될 때 안동읍을 안동시로 정하고 안동군은 다른 명칭으로 정하려 하자 안동군민들이 모두 완강히 반대하였다. 군과 시가 모두 안동의 고을 명칭을 가지겠다는 것이다. 행정당국에서 여러 차례 조정에 나섰으나 시와 군이 한 치의 양보도 없어 하는 수 없이 안동군·안동시로 명칭을 확정하였다. 이에서 분리되는 시·군이 다른 명칭을 부쳐야 한다는 관례가 깨지고 말았다.

1989년 천원군의 인사들 중에 우리도 유서 없는 천원군을 천안군으로 변경하고자 주장하는 이가 있었으나 명칭을 변경하면 장부의 개서 등 번잡한 점이 많으므로 역대 군수가 달갑게 여기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다.

천안시 일부 인사들도 천원군을 천안군으로 환원하도록 요로에 건의해 달라는 요청을 군수에게 전달했지만 군수는 공부의 개서와 각종 표지판의 개작으로 예기하지 못한 경비와 인력이 소요됨으로 비생산적인 군명을 바꿀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여러번 건의하니 군수는 군민의 여론을 들을 필요가 있다하여 설문조사를 하였다. 그 답이 천원군으로 바뀐지 30년의 세월이 지나 정착된 이름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절대다수라는 것이다. 드디어 천안지명 환원 요청이 시대정신으로 발동하였다. 천안시와 천원군 사람으로 조직된 천안향토문화연구회(회장 김성열)에서 천안군명의 환원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우선 민병달(閔丙達) 천안시사학회 회장이 작성한 “천원군은 천안군으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제목으로 천원군이 부당한 명칭임을 주장하는 논지를 발표하였다.

천원군번영회(회장 兪洪根)도 동조·호응하고 군명 변경에 힘쓸 것을 군수에게 촉구하였으나 군수는 천원군의 노년층은 옛날 유서를 생각하여 군명 환원을 희망하는 인사가 있으나 대다수 젊은층은 천안시에 예속된 감을 주는 천안군 환원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천안향토문화연구회에서는 천안신문에 연구논문을 실리는 한편 반대하는 천안군의 유지인사들에게 논지를 우송하여 군명 환원의 당위성을 강조,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고사 풍수지리상에서 천안시의 외곽을 감싸는 외사룡(外四龍)과 그 중심에 내오룡(內五龍) 오룡쟁주형의 명당터에 천안시가지가 있다고 한다. 천안시 전체적으로 구룡희주형(九龍戱珠形), 구룡농주형(九龍弄珠形)이라 한다.

 

천안군명 환원 시군통합 반대실사(實史)

천안시 승격 50년을 지내면서 천안 지명을 지키려는 천안정신이 발동한 사실(史實)을 새삼 공개한다. 천안시는 천안읍이 시로 승격되었으니 천안시의 모태는 천안군인데 천안시에 역사성, 정통성을 모두 내어주고 딴 이름을 지었으니 사리에 맞지 않다. 시군이 분리될때 유서 있는 이름으로 지은 월성군, 금성군, 원성군이 옛이름을 되찾고자 경주군, 나주군, 원주군으로 환원하였는데 왜 천원군만이 족보없는 이름을 지녀야 하는가.

공주군·공주시의 예대로 천안군·천안시가 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호소문을 계속 지역신문에 발표하였다. 천안군수의 설문에서 군명 환원에 반대했다는 천원군 군민들에게도 요지로 호소했다. 천안향토문화연구회(회장 김성열)는 신문 발표한 호소문만 가지고는 미흡하다 하여 천원군 각 가정에 호소문을 발송하였다. 이 호소문을 읽은 정치인, 입장면 박동인이 1989년 시대정신이 발동하여 개명 청원서를 작성하고 천원군 지역가정을 방문하여 청원서에 서명날인을 받았다.

박동인은 7562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하였으며 청원서의 소개의원으로서 정일영 의원 외 32명이 서명하였다. 국회청원이 진행되는 동안 천원군수가 경질되어 천안군 출신 윤병렬(尹炳烈) 군수가 천원군수로 발령되었다. 윤병렬 군수는 천안군으로 명칭을 환원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천원군번영회장인 유홍근 명의로 군명환원 건의서를 행정경로를 통하여 제출하였다.

이렇게 관민 합동으로 열의를 보이자 국회는 청원입법의 형식으로 진행되어 ‘충청남도 천원군 등 3개군의 명칭 변경안’이 상정되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이날이 1990년 12월17일 오후 6시로 천안인의 애향심이 성공을 거둔 날이다. 국회에서 1991년 연말 군명변경에 관한 법률이 제정·공포되어 1992년 1월1일 천안군으로 환원하였다.

역사적으로 조선시대에 천안이란 지명은 지방군명으로는 너무 높은 글자라 하여 자주 개칭되었으나 그때마다 천안사람들의 강력한 반대로 다시 환원하여 지켜온 이름이다. 이에 천원군에서 천안군으로 환원된 사례도 역사의 전철을 밟는 감회가 들어 숙연한 생각이 든다.

윤병렬 군수는 1991년 1월1일에 천안군 이름의 군청현판식을 갖고 천안군 시대를 열어갔다. 5년 후인 천안군과 천안시가 통합되었을때 아마 1990년 12월17일 군명변경을 하지 않았더라도 시군통합으로 천원군의 명칭이 없어졌을 것이다. 혹자는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고생만 하였지 역사의 흐름은 순리를 지키는데’ 헛수고라 하였다. 그러나 천안 명칭을 고수하려는 조상들의 얼이 시대정신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으며, 1995년 통합을 이루는데 큰 힘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천안시는 1995년 법률 제4948호(5/10)로 천안시(天安市)와 천안군(天安郡)이 통합되면서 사실상 천안군, 직산군, 목천군 3군이 금북정맥을 중축(中軸)으로 천안시에 하나가 되었다.

천수천안, 천하대안 천안이 되었다.

달빛에 물든 전설이 있다.

1994년 천안군번영회(회장 유홍근)는 시군통합반대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거세게 통합 반대를 추진했다. 끝내 군민 천안투표를 실시하여 찬성 다수로 통합하게 됐다. 그러나 천안군번영회는 무효 행정소송을 준비하기에 이르렀으나 오해받고 있는 지역이기주의를 포기하고 시·군 통합을 승복하였다. 무효 행정소송이 진행됐다면 시군통합은 지연될 수도 있었다.

1995년 시군이 통합될 때 천안시 22만5000명, 천안군이 10만5000명으로 모두 33만명이었다. 1963년 천안시군이 분리될때 천안군 인구가 13만명으로 천안시 인구 6만6000명보다 많았다. 1963년 천안시 승격 분리 당시 6만6000명 인구가 통합할때 인구 22만5000명이 된 것이다. 1995년 천안시·군 통합인구 33만명이 2013년 65만명으로 두배의 놀라운 증가를 이루었다.

1963년 천안시 승격 인구 6만6000명의 10배가 증가했다. 수도권 인구 이동 중에는 천안시 이동 인구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천안시 인구에서 토박이 인구를 어림해보면 6·25전쟁 직전 1949년 천안인구 3만9695명, 목천인구 5만9682명, 직산인구 4만5027명 등 모두 14만4000명으로 추산된다. 1963년 천안시가 승격되면서 천원군이 분리될때 천안시 6만6000명, 천원군은 목천 7만6000명, 직산 5만5000명으로 13만1000명이었으며 시·군 전체는 19만7000명이었다.

천안시·천안군 대통합으로 천안시는 전국 제일로 역동적인 발전을 이루어 오고 있다. 천안번영회가 시군통합을 반대했던 군 지역 불이익을 염려했던 내용을 살펴서 천안군 지역 천안시민들의 소외감을 갖지 않는 천안광역시 비전이 이루어져야 한다.

고사 풍수지리상에서 천안, 직산, 목천을 통과하는 백두대간 금북정맥의 웅장한 산맥들이 하천과 만나며 거대한 구룡희주형, 구룡농주형의 대길지 천안제일 명당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바람개비 모양으로 외사룡 천원군과 내오룡 천안시가 구룡이 되어 대한민국의 대동맥 핏줄에 새로운 힘과 부족한 기(氣)를 채워주고 흥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천안군 통합은 지역(땅) 통합이고, 인구(사람) 통합이면서 문화정신 통합이다. 천안군·목천군·직산군 그리고 천원군 지명도 천안시 지명으로 천안의 정체성을 전승하고 시대마다 책임, 시대정신으로 승화·선양해야 한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유료기사 결제하기 무통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가장 많이 본 뉴스

종합 뉴스 라이프 우리동네 향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