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오세운(77)씨가 슬며시 책자 하나를 내민다. ‘바람부는 길목에서…’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이게 뭡니까?” 하고 밑을 보니 조그맣게 ‘오세운 시집’이라고 쓰여있다. “아니, 시도 쓰셨습니까” 묻자 뒷머리를 긁적긁적. “별볼일 없는 글이지만, 한번 읽어보세요” 한다.
오세운씨는 사랑하는 형을 6·25때 치열했던 백마고지 전투에서 잃었다. 아픈 상처에 연연하기에는 시대가 각박했다.
‘생존의 전쟁터’에 파묻혀 그리움은 뒷전에 남겨뒀다. “타향살이 26년에 어느덧 60이란 세월이 코앞에 놓여있더라구요.” 인생이 무언지, 정녕 세월의 무정함을 느꼈다.
시를 배운 적이 없지만 절박하게 살아온 생(生)이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1996년 5월 ‘육순’을 기념하며 시집을 냈다. 시집은 남이 보라는 것도 아니요, 스스로 엮어낸 시묶음집이었다. 그는 시, ‘비웃음’에서 <너의 짧은 상식으로 무슨 시냐고/…/ 내가 살아온 넋두리들로>라고 했다.
원래 시는 특별한 사람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시인이어야만 한데, 어느때부터인가 ‘작가’라는 존귀함을 부여하고 특별한 사람만이 시를 쓴다 했다. 잘못이다.
1980년이 돼서 형을 위한 ‘백마고지’ 한 편을 썼다.
<…/ 님들은 떠나시고 총성은 멎고/ 산야에 뿌려진 진분홍 핏물/ 오색단풍으로 물들이고/ 바람에 날개달고 떠나셨나요/ …>
이 시에는 특별히 ‘유족 오세운’이라 토를 달았다.
오세운씨는 “나는 배운게 없어서…”라는 말을 자주 쓴다. 그의 말대로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아간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잖는가.
요즘 같이 풍족한 시대에도 먹고살기 힘들어 하소연하는데, 당시는 어땠겠는가 말이다. “못배운게 한이 돼서…”라는 말도 종종 쓴다.
그런데 그의 말에서, 그가 쓴 시에서 그는 무척 많이 배웠다는 걸 알게 된다. 시 ‘참다운 스승’에서 <…/ 나는 한권의 책들로부터/ 살고 죽엄의 방법을 터득했고/ 무식을 깨우쳐 지식을 독서하여/ 못배운 한을 식견으로 채워서/ 배운자 못지않은 실천의 생활로/ 부족한 부분 한구석을 메꾸며/ 난 스승인 책으로부터 배워왔소> 했다.
그가 고향 천안땅을 다시 밟게 된 건 반평생을 타지에서 보낸 뒤였다. 늘그막에 고향생각이 간절해지며 찾아왔지만 이미 어릴 적 고향은 온데간데 없고 오염과 콘크리트 구조물로 얼룩진 ‘흉한’ 고향이 낯설게 들어찼을 뿐이다.
‘한, 애닯은 사연들’에서 다시 찾은 고향을 보며 느낀 감성을 그대로 표현했다.
<고향을 그려본들 무엇이 있으리오/ 정들었던 옛친구도 동산도 잃었은데/ 뛰어놀던 잔디밭도 이제는 없어지고/ 허물어진 돌담길에 잡초만 무성하여/ 주인잃은 장승만이 말없이 서있구나/ 고향을 찾아본들 무엇을 그리리오/ 정든 우물가도 빨래터도 잃었는데>
가만, 그가 고향을 찾기 전인 1980년 5월에 쓴 시 ‘고향’이 있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담뿍.
<풀벌레 노래하는/ 내고향 어디메뇨/ 까치집 달아놓은/ 우물가 버드나무/ 지금도 물마시고/ 푸른잎 피었을까// 보리밭 오솔길에/ 내고향 어디메뇨/ 땅거미 지을 무렵/ 개울가 물소리는/ 사랑을 속삭이듯/ 오늘도 흐르겠지// …>
오세운씨는 몇 년전 병원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았지만, 혼자의 힘으로 극복해내고 있다.
좋은 생각을 하고, 적당히 운동을 하고, 먹는데 욕심내지 않고. 그런 노력들로 건강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북면에 사는 그는 요즘 봉서산을 자주 오르내린다. 그를 만났더니 고향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진정 살기 좋아졌나요? ‘먹고’는 좋아졌겠죠, 하지만 ‘살기’는 그렇게 보이진 않아요. 천안이 정말 세계100대도시를 키워드로 생각한다면 ‘먹고살기’ 좋아져야 합니다. 그럴려면 물질문명에 신경쓰는 만큼 자연문명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