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30일 초판을 발행했고, 저도 지인들에게 드리려고 책을 좀 샀죠. 그런데 며칠 전 연락이 왔어요. 초판 찍은 것이 다 나갔다나…, 아직 남아있는 책좀 보내달라는 거예요. 좋은 징조예요.”
1988년 시집 ‘못뺀자리’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심훈(천안안서초 교장)씨가 네번째 시집 ‘장항선’을 펴냈다. 1992년 ‘안녕한가 풀들은 드러눕고 다시 일어나서’, 2011년에는 ‘시간의 초상’이란 시집을 내기도 했지만 이번 시집에 대한 열정은 스스로도 대단하다 싶다.
시골사람 제 동네 벗어나지 못하듯, 부여출신인 그도 평생 충남도내로 뻗쳐있는 장항선 주변을 맴돌았다. 그 때문에 예산역전 장마당에서 만난 홍옥을 이야기할 수 있었고, 광천역 신진건널목 옆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도 눈에 밟혔다. 남포역에서 19공탄을 찾아가기도 했고, 주산역에서 우편엽서 한묶음을 덜컥 사기도 했다. 장항선은 그에게 놀이터였고 학교였다.
이번 시집은 뤼팽의 완전범죄 냄새가 난다. 한편 한편 읽는 맛도 있지만, 시집 전체로도 기승전결이 있는 소설로 장치했기 때문이다.
제1부 ‘우리집엔 시계가 많다’에는 혼돈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현실이 추구하는 속도 때문에 들판의 허수아비가 뭉크의 그림처럼 흐물흐물 지나가고, 1001칸 설국열차 칸마다 갑과 을이 생기며 속수무책 목숨을 잃는다. 이같은 카오스의 세계는 우리가 빠름만 추구하면 전경만 볼 수 있을 뿐 배경을 보지 못한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제3부 ‘연기된 고백’처럼 우리는 좀 더 느리게 가고 느리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
작자는 우리에게 치유할 것을 권하고, 그 방법중에 하나로 제2부 ‘장항선’을 슬며시 들이민다. 천안역에서 아산역·온양온천역·신창역·도고온천역·신례원역·예산역·삽교역·홍성역·화양역·광천역·청소역·대천역·남포역에 이르기까지.
“고속으로 진화하는 문화는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고 바람마저도 계급을 받습니다. 속도의 계급에서 조금만 빗겨서면 풍광이 보입니다. 빗겨갈 열차를 기다리는 장항선 단선선로에서 바라보면 길섶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cosmos·질서)와 꽃그늘에 홍옥(사과)같은 그이가 있습니다.”
삶? 베이킹파우더와 도넛 같다고나 할까.
우리네 삶을 바라보는 그의 염려스런 시각이 베이킹파우더를 떠올리고, 느림으로 5억년을 견디며 초월한 듯 시간을 재생하는 곳, 무창포를 만나면서 도넛처럼만 살면 되지 않겠냐고 쿨한 해답을 얻는다.
<중심을 비운 것이 도넛이다/ 베이킹파우더처럼 중심을 향하여/ 자고새면 끝없이 부풀어오르는 욕망> 그에게 도넛은 기억의 중심이어야 맛깔스럽고, 바이러스처럼 의미가 스멀대야 도넛이다.
원구식 월간 ‘현대시’ 발행인은 장항선을 평하는 짧은 글에서 이렇게 매듭지었다.
“장항선은 속도, 시간, 풍경이 어우러져 모여 흐르는 곳이다. 중심은 도넛처럼 비어있고, 시간은 미래를 지향하지 않는다. 시인은 오래 전에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의 조각들을 꿰맞추는 시간여행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김학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