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성거읍 산골마을 위쪽에 자리잡은 천흥저수지는 고려시대에 대단한 규모로 뭇 사람들의 불심을 일깨우던 ‘천흥사’가 있던 곳으로도 유명하며, 또한 문화재를 5개나 간직하고 있는 ‘만일사’도 인접한 곳에서 천년고찰임을 자랑하고 있다. ‘천흥저수지’는 혹여 불교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천흥저수지 앞뜰의 허름한 집에 언제부턴가 ‘금강사’라는 간판이 걸리고, 예사롭지 않은 스님이 기거한다는 말이 조용히 입소문을 탔다. “그림도 그리는데 대단하데요. 특히 나비그림은 따라올 자가 없다나봐요.” 예술인이라는 말에 귀가 쫑긋, 한번 찾아뵙겠노라 한 지 얼마 후 터덜터덜 그가 있는 곳을 찾았다.
반갑게 맞는 이재창(75·풍속화가) 선생은 듣는 같은 말을 서너번씩 해서야 겨우 알아들을 정도로 귀가 먹었으며, 시력도 썩 좋지 않은 듯 했다. 하지만 말은 청산유수로,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른 사고를 열어보였다.
“이게 내가 그린 건데, 이 사람들이 한복을 입고 있으니 천상 한국(인)이야. 빨래터에서 빨래를 빠는데, 이쪽 사람은 핸드폰을 쥐고 있잖어. 지금 소통하고 있는 거지.” 아니, 김홍도나 신윤복도 눈길을 줄 만한 풍속화에 웬 핸드폰? 이거 옛사람들 맞아? 선생의 그림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속에 이질감에서 오는 호기심이 반짝 한다.
그는 오래 전, 출중한 실력을 인정받고서도 불교미술의 1·2·3회대회에서 모두 떨어진 뒤로 다시는 그림대회에 출전하지 않았다 했다. 근데 떨어진 이유가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
보살을 그렸다면 당연히 동자를 그려넣어야 하는 ‘원칙’을 망각하고 개구리를 그려넣었으니 말이다. 당시 심사위원들이 선정대상에 넣고서도 한참을 망설이다 혀를 차고 그림을 뒤집었다. 그런 법이 없는데 어찌할까.
그래도 그의 작품은 꽤 인기가 있어 어느 서울사람은 나비그림을 쫓아다니다 기어코 그에게 1000만원어치 돈다발을 놓고 그림을 가져가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진짜 잘 그리는 건 돌이여.”
나비그림의 스승, 우석 선생이 그의 나이 19세때 “어린 나이에 돌을 참 잘 그린다”면서 그의 호를 ‘청석’으로 붙여주셨다. 그래도 그의 상식을 벗어난 생각만큼이나 할까.
이재창 선생의 그림에는 봄에 나비가 날고, 경주에 나선 토끼와 거북이가 함께 춤을 춘다. 나비가 날아다니는 풍경속의 바위는 모두 동물형상을 하고 있고, 달마는 품위가 있어야 한다며 선 굵은 위엄을 표현해놓았다.
그의 말과 그림을 보노라면 천상병 시인이나 걸레화가스님 중광이 괴짜라 하더니, 그도 그런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