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설치된 오규봉 하사 동상. 친동생 오세훈씨가 함께 했다.
10월16일(수) 오후 4시경 천안삼거리초등학교 앞에 두명의 군인이 찾아왔다. 백마부대 1대대 김보성(지원과장) 대위와 김민석(인사담당관) 중사라고 소개한 이들은 백마고지의 영웅 오규봉 하사 동상에 꽃목걸이를 걸고 묵념했다.
천안출신의 오 하사는 강승우(제주) 소위, 안영권(김제) 하사와 함께 육탄으로 혈로를 뚫어 백마고지 탈환의 신화를 창조해낸 ‘육탄삼용사’로 알려져 있다. 부대를 대표해 김제를 들러 천안을 찾은 이들은 다음달 제주도 일도2동에 설치된 강승우 소위 동상도 찾아볼 계획임을 밝혔다.
참고로 강 소위 동상은 1991년, 안영권 하사 기념비는 1984년에 세웠으나, 천안은 2013년 6월에야 육군9보병사단과 백마고지 참전전우회 회원들의 노력으로 뒤늦게나마 오규봉 하사 동상을 건립했다.
“이제서야 제 속의 한(恨)을 모두 풀었습니다. 모진 세월이었습니다. 또한 그럴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죠. 누가 알겠고, 알아주겠습니까. 어려운 시대를 만난 우리가 겪어내야 할 숙명이었던 것을요….”
형의 동상을 쳐다보는 오세운(76·북면 연춘리)씨 양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동생 오세운씨가 들려주는 ‘가족이야기’
천안 북면에 살고있는 오세훈씨는 백마고지 육탄삼용사의 한명인 오규봉 하사의 친동생이다. 지난 16일 형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감격에 겨운 듯 때때로 눈시울을 붉혔다.
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은 오세운씨 가족은 물론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특히 큰형에 대한 애끓는 마음은 ‘체증’으로 남아 50년을 함께 했다.
“7남매의 장남이던 큰형님(오규봉 하사)이 전장터에 나선 건 23세때로, 백마부대의 전사통지서를 받게 됐고 이 때문에 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셨죠. 가뜩이나 집도 불타버려 살 길조차 막막한 때였습니다.”
오세운씨의 그때 나이는 14세. “큰형 유골을 안고 풍세면 가송리의 어느 산기슭에 묻었죠. 그리고 무궁화 6그루를 구해 심었습니다. 당시는 전쟁터에서 죽는 군인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보편적 슬픔을 간직한 채 속으로 울었습니다.” 무궁화는 10년이 지나도 꽃이 피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군대갈 나이(1960년)가 된 오씨가 논산훈련소를 거쳐 흘러들어간 곳이 결국 ‘백마부대’였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1963년 제대 후 오씨는 빈손으로 무조건 서울에 상경, 안 해본 일 없이 노력한 끝에 16년만에 집 한 채를 마련해 아버지를 모셨다. 1970년대 중반, 큰형에 대한 슬픈상처가 세월에 묻혀 아물때쯤 뜻하지 않던 소식을 접하게 됐다. “당시 ‘일요신문’에 형님 이야기가 다뤄진 거예요. 휴전협정을 맺기 전 24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뀐 치열한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육탄삼용사’의 한명으로 소개된 것이죠.”
그때서야 아버지는 물론 온 가족이 큰형의 죽음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를 알게 됐다.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빗발치는 기관단총을 잠재우기 위해 백마부대 1대대 3소대의 강승우(소위) 소대장과 안영권·오규봉 하사 3명이 폭탄을 안고 적진을 향해 돌진한 용맹스런 행동으로, 결국 백마고지 정상을 차지할 수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산기슭에 묻혀있던 형님의 유골을 20년만에 국립서울현충원 묘역으로 옮기게 됐어요.” 초등학교 교사였던 여동생은 오빠인지도 모른채 학생들에게 ‘육탄삼용사’를 가르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돼 감격했다.
오규봉 하사 동상 앞에서 형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오씨의 눈이 잠시 불거졌다. “형님의 영웅담을 알게 되면서 제 삶 또한 변했습니다. 형님께 누(累)가 되지 않도록 더욱 바람직하게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또다른 소원을 갖게 됐다. 죽기 전에 고향 천안에 내려가 형님에 대한 기념비(동상) 하나 세우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한 것.
삶의 고단함에 시달리다, 12년 전 서울집을 팔고 북면 연춘리에 임시방편으로 허름한 집을 한 채 구했다. 이미 오씨 자신은 물론 아내조차 ‘시한부’같은 질병을 안고 있고 하루하루 불안하고 불편한 생활을 영위하며 형님일에 백방으로 쫓아다녔다.
그러나 교과서(초등학교 바른생활5-1/ ‘백마고지의 휘날리는 태극기’)에서도 등장하는 육탄삼용사에 대한 지역사회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많은 노력들이 허사가 돼 체념한 상태에서 2012년 11월 자신이 그간 수집했던 자료를 전부 천안박물관에 기증했다. “포기하니 마음 한 구석이 오히려 편해지더군요.”
그런데 삶은 참 아이러니했다. 마음을 접으니 기회가 다가왔다. 2012년 11월 육군제9보병사단(백마부대) 김용우 사단장이 그를 초대했고 함께 사열까지 받는 영광을 누렸다. 정부는 이들 육탄삼용사를 ‘삼군신’으로 명명했고, 백마부대측은 추모비 건립을 위해 사병들과 백마전우회 등을 통해 후원모금을 진행했다.
천안시가 삼거리초등학교 도로 맞은편에 부지를 제공했고, 모금액은 천안출신 오규봉 하사 동상건립이 가능하게 됐다. 여러노력에 힘입어 2013년 6월7일 오후 3시 동상제막식을 갖게 됐고, 오씨는 형님에 대한 한(恨)을 풀게 됐다.
<김학수 기자>
가장 치열했던 ‘백마고지전투’
하루에도 몇 번씩 고지주인이 바뀐… 전쟁의 참혹·잔학사
백마고지 전투를 영화화한 ‘고지전’의 한 장면.
1952년 10월6일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북조선측의 요청으로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중에 현 접촉선이 군사분계선이 될 것을 대비, 쌍방간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었다. 백마고지는 북한강 동쪽에 위치한 독립고지로서 철원, 금화, 평강, 삼각지대안의 교통로를 제압하는 전략상의 주요고지이다.
중공군은 백마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정예 3개사단을 동원해 1만4000여명의 큰 병력이 개미떼와 같이 밀려들었다. 이날 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국군은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면서 격퇴시켰다.
다음날 밤 백마고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한 중공군에 의해 일시 철수했던 국군은 역습을 감행해 다시 백마고지를 탈환했지만 10월8일 새벽 고지 일대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자 적은 제5차 공세를 재개했다. 국군은 사력을 다해 맞섰으나 짙은 안개로 포병 및 항공지원을 제대로 받지못한 가운데 주봉을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국군 9사단은 오후 5시 제28연대 제3대대를 투입 또다시 반격을 가해 장장 8시간여의 격전을 거듭한 끝에 밤 11시가 돼서야 마침내 주봉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동안 치열한 공방전에서 28연대와 30연대는 거의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많은 병력을 잃었다.
9일밤 자정이 지나면서 중공군은 또다시 집요한 공격을 개시했다. 3시간여에 걸친 파상공격으로 밀어닥친 적은 새벽 3시경 주봉과 그 우측능선의 일부를 수중에 넣었다. 날이 밝자 사단은 적이 점령한 고지 정상에 1만7700발의 포탄과 항공기에 의한 화력을 집중투하하고 이날 밤 제29연대로 하여금 역습을 전개했다. 연대는 적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자정 무렵 주봉을 재차 점령했다.
10일 새벽 적은 정상을 향해 개미떼처럼 기어오르고 있었다. 새벽 4시 무렵부터 피아간에는 수류탄 투척전과 백병전이 전개됐다. 처절한 전투가 전개됐고 9부능선으로 철수한 국군은 제2대대의 증원을 받은 후 역습을 감행, 새벽 6시30분 다시 정상을 탈환했다.
10월11일 밤 고지는 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나 12일 아침 반격해 재탈환했으며 다시 적의 반격을 받아 고지를 빼앗겼다. 이같이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10월15일까지 계속한 끝에 마침내 탈환에 성공했다. 이어 제29연대가 기세를 몰아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게 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퇴시켰다. 거의 궤멸상태에 이른 중공군 제38군은 예하사단을 철수시켜 전선에서 물러났다.
결과적으로 국군 제9사단은 10월6일부터 중공 제38군의 공격을 받아 연 10여일간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해 7회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수행한 끝에 백마고지를 확보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은 총 9개연대중 7개연대를 투입해 그중 1만여명이 전사 또는 포로가 된 것으로 집계됐으며, 국군 제9사단도 총 3500(부상 2500명)여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고됐다.
한편 이 백마고지 싸움에서 전쟁영웅이 탄생했다. 강승우 소위와 오규봉·안영권 하사가 그들로, 이중 천안 성환출신의 오규봉 하사도 있었다.
1951년 12월 오규봉(23) 하사는 부산 피난시 군대에 지원입대해 육군 백마부대 제9사단 30연대 1대대 1중대 3소대 소속으로 철원 백마고지 탈환작전에 참가하게 됐다.
제9사단장 김종오 장군은 제10차 공방전이 끝나자 반복의 쟁탈전으로 변해 장기전이 될 공산이 크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야말로 마지막 결전으로 승부를 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대적인 공격전략을 세웠고, 연대장 임익순 대령은 고지탈환 선봉을 오규봉 하사 소속인 제1대대(대대장 김영선 소령)에게 맡겼다.
이윽고 10월12일 공격명령이 아침 8시 정각을 기해 내려졌다. 아군 포병이 20여분에 걸쳐 공격준비 사격을 퍼부었고 오규봉 하사 소속인 제1대대는 주봉공격에 들어갔다. 그러나 고지정상을 바라보는 가까운 거리까지 진격한 아군은 더이상 전진을 못하고 고전하기 시작했다. 고지정상까지 오르는 길이 너무 가파로운 데다가 간단없이 쏘아부치는 기관총 때문에 한발도 전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제3소대장 강승우(康承宇) 소위가 비장하게 부르짖었다. “저 기관총 진지만 잠재우면 고지를 탈환할 수 있다. 나와 함께 저 기관총을 잠재울 용사가 없느냐?” 그러자 그의 소대원인 오규봉(吳奎鳳) 하사와 안영권(安永權) 하사가 약진해 왔다. 강승우(康承宇)와 오규봉·안영권 하사는 양손에 수류탄을 빼들고 눈을 부릅뜨고 고지정상에 이르는 가파로운 벼랑사이를 달릴때 적의 기관총은 무차별 사격을 가해오고 있었다. 신들린 듯 육탄3용사는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몸에 지니고 순식간에 고지 정상까지 진격해 수류탄을 까던졌다. 폭음소리가 연달아 올리며 적의 기관총진지는 완전히 박살났다.
육탄3용사는 기관총 진지 바로 아래 온몸이 벌집처럼 된 채 장렬하게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중대원들은 순식간에 고지정상에 진격해 백마고지 주봉 정상에 태극기를 꽂았다.
<김학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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