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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충남향토사대회/ 천안역사속의 외국인들 ‘우린 어떤 사이?’

김성열 천안향토연구회장 발표… 근대시대 천안에서 활동한 역사속 외국인

등록일 2013년09월10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지난 3일(화) 오후 1시 공주대 자료도서관에서 ‘제6회 충남향토사대회’를 열었다.

1부는 ‘공주역사속의 외국인’에 대해, 2부는 ‘천안역사속의 외국인’, ‘조치원의 일인묘지석’, ‘공주 계룡산성과 출토문자와’란 주제로 주제발표했다.

천안역사속의 외국인과 관련해서는 김성열 천안향토연구회장이 나서 근대시대 천안에서 활동한 외국인들의 삶과 역사적 사건을 다뤘다.

 

외국인들, 대부분 종교와 전쟁으로 인연맺어

 

“세계 인류역사를 보면 열린 나라, 열린 민족은 일찍부터 문명이 발전했다. 역사는 스스로 문을 열지 않으면 강제로 열게 했다.”

김성열 천안향토연구회장은 우리사회가 과거 폐쇄된 외세정책을 펴 어려움을 겪기도 한 역사가 있었다며, 그럼에도 전쟁 등의 역사적 사건이나 종교 전파를 목적으로 한 많은 외국인들의 왕래가 있었고 천안역사에도 그같은 흔적이 기록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는 먼저 천주교 프랑스인 신부를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천안 성거산에 천주교 신자들이 들어온 시기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로 추정된다. 특히 프랑스선교사 중에서 칼래(N.A.Calais) 신부가 충청도 북부와 경기도, 경상도 일대를 관할하게 되면서 사목중심지를 성거산 소학골로 옮겼고, 이후 1866년 병인박해 이전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벌였다.

병인박해시 목천지역에 은신하며 활동한 신부들은 두세(1884), 베르모렐, 뮈델, 리델, 칼레, 페롱 등이며, 이후 목천지역에 천주교 공소들을 설립하고 교리를 전파한 신부들은 퀴를리에, 드비즈, 공베르이다. 또한 천안 성황동에 천주교 성당을 설립하고 어린이 양육사업과 선교에 헌신하신 신부들도 있었는데 스넬, 길바드리시오, 폴리, 에밀리오, 구인덕, 고야고버이다.

암울한 시대에 우리고장에 개명·개화로 소망을 주고 계몽해 주었던 미국인 선교사들도 많이 있었다.

천안읍 감리교회(서릿말)와 천안제일교회(문화동)를 중심으로 많은 선교사들이 다녀갔는데, 그 면면은 스웨러(1901), 맥길리(1903), 케이블(1905), 스웨러부인(1907), 아더샤프(1904), 테일러(1907), 버스커크(1907), 스크랜튼(1908), 윌리암(1917), 샤프(1906), 샤프부인(1916), 아멘트(1918), 귀애다부인(1931), 베어러(1934), 아멘트부인(1935), 채핀부인(1938), 주덕(1950), 쥬디(1951), 시드웰(1956), 시드웰부인(1959), 죤레위(이대위·1971) 등이다. 이들 외에도 천안부대성공회를 개척한 단아덕(1905) 신부, 병천교회를 개척한 부재열, 김우일 선교사, 그리고 천안침례교회를 중심으로 6·25전쟁 후 헐벗고 굶주린 우리들에게 구호물자를 나누워 주던 다니엘죤레위(1953) 선교사 목사도 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에서 들고 일어날때 천안지역은 미국인 선교사 테일러, 윌리암, 샤프목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한국나사렛교단에 선교사 목사로 파송돼 나사렛대학을 설립한 도날드오웬스 박사와 35년간 천안지역사회 교육문화 발전에 공헌해 온 나사렛대학교 초대총장 윌리암 패치(1973)선교사 목사도 있다.

1950년 6·25사변통에 인민군에게 순교당한 천안성당 심응령 테스테라도(프랑스 66) 신부가 있고, 천안읍 감리교회에서 여성운동을 헌신적으로 봉사하다 과로병으로 순교한 여성선교사 베어러(1933·한국이름·배의례)도 있다.

1908년 천안 입장에 처음으로 광산병원을 설립한 선교사는 스크랜튼 의사 목사와 맥길 선교의사로 알려지고 있으며, 제중원 제1회 졸업생(연세대학교 의대) 김희영을 1917년 첫 의사로 파송했다.

이외에도 직산금광 침탈과 관련해 삽택영일 등 많은 일본인들이 머물고, 1907년 을사늑약이 체결될때 일본헌병 980명이 천안군에 주둔했다. 입장지역 광산이 개발되면서 미국인 광산기술자 15명과 영국인 광산기술자 2명, 미국인 의사 1명 등도 머물렀던 기록이 있다. 중국인 또한 삼국시대 이전부터 천안과 인연이 닿아있고, 1884년 청일전쟁때도 군부대 보급부대를 따라 병사들 외에도 유입된 상인들이 천안에 거주했다고 전한다.

1950년 7월8일 한국전쟁 당시 천안시가지 전투에서 미 육군 제24사단 제34연대 연대장 마틴대령과 부대원 129명이 북한 인민군에게 전사한 사실도 있다. 이에 1981년 7월8일 창립된 천안 7.8전몰미군추모기념사업회(창립회장 김성열)는 매년 천안삼거리 초등학교 옆 7·8전투기념 마틴공원에서 주한미군을 초청해 추모행사를 갖고 있다.

김성열 연구회장은 “2012년 통계에 천안에 사는 외국인은 1만4200명에 이르며, 외국인이 소유한 토지면적도 2011년말 대비 431만m²(1.9%) 증가했다”며 “역사적으로 다른 나라사람들과 어울려 산 경험이 별로 없는 우리로서는 이제부터라도 그들과 함께 사는 지혜를 배우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학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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