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내려준 천안부(府)를 건치한 태조 왕건의 전설과 유적은 천안 곳곳에 많이 전해온다. 왕건왕이 삼한통일을 염원하여 풍수지리설을 믿고 왕자(王字) 형국세인 왕자산에 올라 동서남북을 살펴보았다.
왕자 성씨와 같은 지형국세인 왕자산은 이곳 도솔땅의 진산(鎭山)으로 하고 오룡지형세가 맞은편 안산(案山) 여의주 남산(南山)을 향해 뻗쳐 있었다. 오룡쟁주지형세 이곳을 도모하여 건치하면 숙원인 삼한을 통일하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고 세상을 평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10월1일(음 9월8일)은 AD936년에 고려 태조 왕건이 천안부를 진지로 하여 삼한을 통일한 날이다.
왕자산성을 쌓고 이곳에 천군(天軍)을 양병하고 훈련한 곳이 고정(鼓庭)이고 군량미를 보관했다는 곳이 유량골이다. 군기를 꽂아놓았다 하여 장대(장태)산이 있고, 군마들을 풀어놓았던 곳이 마점산(馬占山)이다. 천군을 주둔시켰던 곳이 둔지마을이고 울책(나무성채)을 쌓은 곳이 고래울마을이었다. 도리티고개(道里峙迴峙) 너머에 고려산성도 있다.
산성에 올라 남북을 바라보면 북쪽에 흑성산, 왕자산, 성거산, 위례산이 있고 남쪽에는 금성, 이성, 운주성이 한눈에 보이는 군사방어 전진기지 요새(要塞)이다. 과연 천안부를 건치한 이땅은 왕건왕에게 하늘이 내려주신 전략전진기지였다. 왕건왕은 도솔땅이라 이르는 사산(직산), 대목(목천), 탕정(아산) 세 고을의 일부를 떼어 취하고 관할에 두어 天安府(천안부)를 건치하였다.
현재로는 천안시 일원과 아산, 배방면, 음봉, 탕정까지 포함되었었다. 여의주(如意珠)라 일컫는 남산(南山)이 바라보이는 중앙 오룡쟁주의 명당 황룡에 관아를 지어서 뒤쪽 진산(鎭山)으로 삼았다. 낮은 곳에는 논을 만들고 높은 곳에는 밭을 개간하고 3000호를 이주시켰다. 그리고 천안부 지방장관 부사(府使)인 도독(都督)을 왕건왕의 넷째황후의 아버지 황보제공(皇甫悌恭)을 임명하였다.
사돈을 부사인 도독으로 임명할 정도로 천안부는 중요한 전략전진 지역이었다. 또 왕건왕은 천안부 태수인 林彦(임언)의 딸을 열한번째 황후로 삼아 천안부원부인이라 존칭하여 천안부의 품격을 높이고 천안부의 위상을 중요하게 확인시켰다. 천안부를 AD930년에 건도한 후 AD936년 6월에 후백제를 정토(征討)하기 위해 태자무(혜종)을 앞세워 박술희 장군 1만군대가 천안에 주둔한다. 같은 해 9월에(태조 19년) 왕자산 고정 진영에 왕건왕이 직접 원정하였다. 머물렀던 곳에 유황사(留皇寺)가 있었다 한다.
태조 왕건은 도솔땅을 답사하는 길에 직산 수헐원(시름세)에 머물며 동쪽에 있는 산을 바라보고 오색구름에 휩싸여 있는 위례산 쪽을 바라보면서 성현이 살고 있는 산이라 여겨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리고 왕건왕이 태어난 개성의 성거산과 같은 산이라 하여 위례산의 인근산을 성거산(聖居山)이라 이름지었다.
왕자산(AD944)에 태조묘(神宮)를 세우고 954년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위치는 정확하게 전해오지 않고 있다. 성(聖)말 또는 성(城)말이라는 마을이름이 전해오고 있었다. 1349년에 영주(寧州)군수 성원규(成元揆)가 태조신궁(태조전)을 수리하려 발원하고 준비했으나 한성 인사발령으로 복원 수리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왕건 군대가 주둔했던 군영의 장소인 고정(鼓庭)에 정자를 복원 낙성하고 이를 기념하는 회고정(懷古亭)의 정문(亭文)이 전해온다.
고려 태조 왕건의 묘(廟)와 회고정(懷古亭)을 왕자산에 자리잡아 복원해야 할 역사적 의미가 있다. 왕자산은 이때부터 태조산이라 전해오고 있다. 태조 왕건은 934년(태조17년) 5월에 천안부 예산진(禮山鎭)을 방문하고 발표한 영문(令文)이 전해온다.
내가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뜻을 잘 알아서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지극한 평정의 뜻이었다. 천안(天安)이란 지명은 오랜 역사동안 분열과 전란, 혼돈시대 속에서 통일과 평화의 시대를 대망하는 백성들의 염원이 반영된 뜻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