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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천안 한여름 역사기념일

김성열 천안시 역사문화연구실장 기고칼럼

등록일 2013년07월05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7월은 1950년 6`25전쟁으로 천안지역 인공 79일이 시작되는 달이다. 6`25전쟁을 도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유엔이 북한불법남침으로 규탄하고 유엔군 파병을 결의하였다. 또한 1953년 7월27일에 6`25전쟁을 휴전협정으로 체결조인한 달이다. 6월25일 유엔은 즉시 유엔이 합법정부로 공인한 자유대한민국정부를 침범한 북한인민군 침략행위는 유엔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탄한다.

6월27일 미국 해`공군 한국 참전을 잠정 결정한다. 6월28일은 국군이 한강인도교를 폭파한다. 3일만에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된다. 6월28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세계평화와 한국안전보장을 위해 군사원조 제공을 결의한다.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병력을 즉시 보내고 이탈리아를 비롯한 6개국이 의료, 물자, 의료진을 도왔다. 6월28일부터 대한민국 상공에는 일본에서 날아온 제트기와 무스탕 호주기 그리고 B29기가 제공권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7월1일 일본을 출발한 미국 육군보병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 스미스 중령 특수부대 406명이 비행기로 부산에 도착하여 열차편으로 천안을 지나 평택에 도착한다. 그리고 제34연대는 배로 일본을 출발하여 부산에 입항하여 열차편으로 대전에 도착하여 전황을 파악하면서 이동명령을 기다렸다. 7월3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오산 북쪽에 진지를 점령하고 인민군 전차탱크와 접전한다. 인민군 전차탱크를 파괴할 무력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철수한다.

7월4일 제34연대 제1대대는 평택까지 이동한다. 7월5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죽미령진지를 점령하고 최초 오산전투에 참전하였다. 제21연대 철수병력은 안성, 평택 진지로 이동하여 점령한다. 제34연대 제1대대는 퇴각하는 제21연대 병력을 맞이하면서 평택에 진지를 점령한다. 국군은 경부선을 중심으로 한 서부전선을 미군에게 작전을 위임하고 중부전선으로 이동한다. 미군은 남하하는 인민군을 지연 저지하는 작전명령을 받는다.

7월6일 제34연대는 평택에서 성환으로 철수한다. 제21연대 병력은 안성에 진지 점령한 후 전투없이 성거를 지나 천안도리티고개까지 철수한다. 7월7일 철수 작전 지시명령을 잘못 판단한 제34연대는 평택, 성환에서 천안 철수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천안북쪽 재접전을 위해 이동한다. 한편 인민군은 성환에서 아산으로 돌아 천안서부방면 백석동, 신방동으로 천안에 진입한다.

안성방면에서 퇴각하는 미군 제21연대를 쫓은 인민군 병력은 성거쪽에서 천안으로 진격한다. 천안역전 옛 천안경찰서에 제34연대 지휘본부는 서북동에서 압박하는 인민군 병력에 완전 포위되었다. 부대동, 신부동, 천안역 부근 전투에서 패전당한 제3대대는 천안읍내 전역에 흩어져 지휘체계없이 무질서한 시가전을 하면서 구성동을 지나 도리티고개쪽으로 후퇴한다.

7월8일 아침 8시 인민군 탱크전차 6대가 천안읍내에 진입하고 일부병력이 포위당하고 있다는 보고받은 제34연대장 마틴대령은 격전장에 직접 뛰어들어 바추카 포를 들고 탱크와 맞서 대결한다. 탱크가 발포한 포탄은 마틴 대령을 산산조각 내었다. 포로의 증언으로 후에 행방불명된 연대장이 구성동 길가에서 산화한 것이 확인되었다. 한국전쟁 첫 연대장 전사였다.

7월8일 제34연대 제3대대 포위를 풀고 후퇴를 돕는 도리티고개 포병지원 폭격은 천안을 온통 불바다로 만들었다. 7월8일 밤 10시까지 모든 제34연대 병력은 129명 전사자와 168명 포로를 남겨두고 구성동 거리를 지나 도리티 고개를 넘어 소정리, 공주로 철수한다. 7월8일 밤 천안은 인민군이 점령한다. 9월25일 천안이 수복되기까지 인민공화국 79일이 시작된다. 천안읍사무소(현 동남구청) 회의실에 구금됐던 168명 미군들은 북쪽으로 이송됐다. 인민군에 점령된 천안은 79일동안 몸살을 앓게된다. 우선 인민위원회와 인민군정치보위는 우익인사들을 검거하여 천안읍사무소 회의실과 서고에 감금한다. 1953년 7월27일은 6`25전쟁 휴전협정 조인이 체결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유엔이 추진하는 휴전을 반대하여 전 국민 휴전반대

데모와 북진통일을 주장하였다. 휴전은 곧 영원한 남북분단이며 민족통일은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국군만이라도 계속 북진하여 국토통일을 이룩하자는 것이다. 1950년 11월24일 중공군참전에 이어 3년동안의 지루한 전쟁을 참전국들은 진저리를 내었다. 끝내 유엔은 휴전협정에 조인하고 휴전선을 중립국에게 감시를 맡긴다. 북한이 도발한 6`25전쟁은 3`8선 분단을 휴전선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는 3년동안 인명피해 실상이다. 천안지역 사망자는 폭격사망 95명, 좌익측 78명, 우익측 52명, 학살자 64명(한국 6만명 중), 납북자 282명(전국 8만명 중)이다. 6`25전쟁 전사자는 국군 257천명, 유엔군 15만명(미군 4만명), 민간인 사망자 245천명, 양민학살 13만명, 민간인 행방불명 30만명, 피난민 700만명, 전쟁고아 10만명, 전쟁미망인 30만명, 인민군 전사자 52만명, 중공군전사자 90만명이다.

7월 무더위는 6`25전쟁 동족상잔 가슴아픈 역사를 연상하는 한 달이다. 서로받은 깊은 원한의 상처를 용서와 화합 사랑으로 뛰어넘어 자유민주로 민족을 평화통일하여 완전독립을 완성하는 시대정신을 발흥하자. 자유통일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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