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은 황진이, 허난설헌, 이매창이다. 조선의 3대시기(三大詩妓·시에 능한 기생)로는 부안의 이매창(1573~1610), 개성의 황진이(1506~1544 추정), 그리고 허난설헌 대신 평안남도 성천의 김부용(추정 1800-1855)을 말한다.
이매창과 황진이는 각각 고향인 부안과 개성에 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김부용은 그 묘를 알 수 없다가 1975년 천안향토사계가 천안 광덕의 한 이름없는 묘가 그의 것이라고 하면서 현재까지 매년 추모제를 지내오고 있다.
매창의 묘는 지방기념물 제65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지만, 부용의 묘는 아직 그 근거를 인정받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급기야 최근 ‘이 분묘는 개장이전되므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라는 푯말이 묘지 앞에 박히면서 ‘발등에 불 떨어진 격’이 되고 있다.
부안 매창(梅窓)의 묘는 현재 지방기념물 제65호로 지정돼 있지만, 천안 광덕의 운초 김부용 묘는 근거가 뚜렷이 않은 관계로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향토유적으로만 남아있으며, 이제 그마저도 산주에 의해 사라질 판이다.
김부용의 묘? 미약한 가설에 의지한 주장일뿐
시 문화관광과 이규왕 문화재팀장은 “분묘 개장하게 되면 아마 관할 동남구청이 운영하는 무연분묘(구룡동 소재)로 가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타깝지만 아직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아니기에 냉정한 절차가 기다리고 있다.
김부용 묘로 발견된 것이 1974년.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흘렀건만 시행정은 아직 김부용 묘가 맞는지 기본적인 연구나 자료수집조차 안돼있는 상황이다. 이를 두고 천안향토사계측은 ‘향토유적 수난위기’ 또는 ‘수수방관’ 등의 불만섞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번 산주의 분묘개장이전건과 관련해서도 시는 뒤늦게 알고 천안향토사계측의 대책에만 의지하고 있다.
다행히 ‘개장이전’의 불행은 막을 수 있을 듯하다.
당시 운초 묘라고 주장했던 김성열 천안역사문화연구실장의 말을 빌면 “이장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40년 전 서울 유씨라는 산주가 매입하면서 산에 있는 묘는 건들지 않기로 약조한 바 있으며, 비록 당시 그같은 약조를 담은 계약서를 찾지 못한다 해도 이곳 마을사람들이 증언해줄 수 있다고 밝혔다.
김 연구실장은 “산주측과 연락해 약조부분을 말했더니, 내려와 만나겠다고 하니 잘 풀릴 것”이라고 자신했다. 당장 운초 묘 부근을 개발하려는 것도 아니고, 산 전체 분묘를 대상으로 개장이전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최소한 운초 묘를 지키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며 “안되면 운초 묘와 관련된 부지만이라도 매입하는 방법을 찾아보면 된다”고 했다.
‘관련 학술토론회 연구용역’ 발주·검토해야
김부용 묘는 맞는지의 여부를 떠나 천안향토사계에 의해 주장돼 왔고, 그에 따라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 추모하고 점차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해 천안향토사연구회는 운초 김부용 묘를 문화재로 지정해달라 신청했다. 이에 천안시는 검토해 충남도로 올렸지만 올해 2월 회신에는 ‘전언 외 김부용 묘라는 근거가 빈약하다’며 보완할 것을 요구했다.
시 문화관광과 전경아씨는 “문화재 지정과정이 두가지 있는데, 시가 자체추진하는 것과 외부 단체나 개인이 지정해달라고 신청하는 것”이라며 운초묘는 후자에 속하며, 천안향토사계측에서 좀 더 분발해 보완해주길 희망하고 있다.
현재 운초묘가 문화재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명확한 근거가 필요한 상황이다.
40년 전 발견당시 인근마을주민인 서상욱씨가 구두증언했고 이를 천안향토사계에서 녹취한 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서씨는 고인이 되었으며, 그의 구두증언이 확실한 근거가 될 수 없는 처지다. 이에 안동김씨 문중을 조사해 140년 전 김이양 대감의 소실이던 김부용 묘를 추적해야 한다.
김성열 천안시 역사문화연구실장은 “그곳이 예전엔 안동김씨 문중의 산으로, 여건만 되면 김부용 묘가 맞는지 아닌지를 조사·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 천안향토사계는 천안시가 관련 학술토론회 연구용역을 발주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광덕산의 묘가 운초 김부용의 묘가 맞는지는 결국 시의 의지에 달린 셈이다.
운초 김부용은 누구?
김부용(金芙蓉)은 평안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고 한다. 4살때 글을 배우기 시작해 11살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한 문재로 알려지기도 했다. 11살때 부친을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마저 잃은 부용은 어쩔 수 없이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시명(詩名)을 운초(雲楚)라 하는 부용은 영특하고 용모도 몹시 고와서 뭇 사내들의 가슴을 태웠다. 시문과 노래와 춤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얼굴마저 고와 천하의 명기로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으며, 그의 나이 19살때 정사에만 힘쓰는 명관(名官) 김이양 대감에게 소개되는 인연을 가졌다. 그때 김 대감의 나이는 이미 75세였다. 부용을 기적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었고, 정식 부실(室)로 삼았다.
그들이 깊은 인연을 맺은지 15년이 되는 1845년 김대감은 91세의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고, 이때 부용의 나이는 겨우 30 안팎(추정)이었다. 부용은 고인과의 인연을 회상하면서 일체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오로지 고인의 명복만을 빌며 얼마(추정 5년~10년)를 더 살았고, 그녀 역시 님을 보낸 녹천당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임종이 다가오자 유언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대감마님이 있는 천안 태화산 기슭에 묻어달라’ 했다 한다. 반백의 생애동안 그녀는 운초시집, 오강루(五江樓) 등의 문집에 한시 350여 수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