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뉴스등록
맨위로

慰禮城(위례성) 地名(지명) 小考

<김성열 기고 칼럼>

등록일 2012년08월20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慰禮城(위례성) 지명이 역사적 근거 없이 서울 송파구 위례성 대로 지명으로 차용당하고 있다. 慰禮城(위례성) 蛇山(사산) 稷山(직산) 지명이 같은 지방에 공존하고 역사서에 같이 기록되어 전승되는 곳은 오로지 천안지방 뿐이다.

위례성은 백제시대(AD 18년) 사산은 통일신라시대(687년) 직산은 고려시대(940년)에 사용되어 기록된 지명들이다. 위례성(울래골) 사산(유라) 직산(위리) 모두 한문표기는 달라도 발음은 같이 불러온 지명이다. 전 수원대학교 교수 강길운 박사 논문을 발췌하여 소개한다.

풍납토성이 “백제의 도읍지가 거의 틀림없다.” “첫 번째 도읍지일 개연성이 크다”는 주장에 대해 風納土城은 백제의 두 번째 도읍지였음을 지명 연구를 통해서 확실하게 밝혀 두고자 한다.

이제 도읍지를 왜 ‘위례성’(慰禮城)이라고 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전기백제 지배층과 고구려)의 지배층은 주로 몽고족의 부리야트족인데, 어떻든 ‘위례성’(慰禮城)도 몽고와 대응되는 ‘국성’(서울)의 뜻일 것으로 추정된다. ‘慰’의 현대음은 [위]이지만 그 옛음은 [울]이므로 본시는 [울레성]으로 읽다가 나중엔 한자음의 변화로 [위례성]으로 읽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삼국사기』지리지4의 ‘國內城 或云 尉那巖城 或云不耐도 같이 몽고계인 고구려의 수도의 명칭이므로 이것도 ‘慰禮城’과 같은 말일 것이다.

그런데. 國內가 國을 뜻하는 몽고어의 향찰(鄕札))이라고 보면, ulus(國)<몽고문어>는 ulus>ullu>ulle>ulne>ulrä의 발달 과정을 밟은 것을 內[nuǝi>nǝi>ne>nä]로 말음 첨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尉那는 [ulna]로 음독할 것인데 이것은 ulnƐ의 유음 표기일 것이며, 不耐는 ülü>üle(不)<몽고문어>가 üle>ulle>ulne>ulnä의 발달 과정을 밟은 것을 耐[nǝi>ne>nä]로 끝소리를 첨기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따라서 여기의 ‘울레~울내~위레’들은 모두 어원적으로 ‘나라’를 뜻하는 말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國內ㆍ尉那ㆍ不耐’와 더불어 ‘울례>위레(慰禮)’는 ‘國’을 뜻하는 말이므로 慰禮城은 수도ㆍ국도를 뜻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서울’을 [울레성>울내성]이라고 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城도 본시는 忽[quǝt>kot>kol>hol]로 표기되었으니 이것도 qoto(城)<몽고문어>가 qoto>kot>kol의 발달 과정을 밟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첫번째 수도만 그렇게 불렀을 까닭이 없으니, 두번째 세번째 수도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수도로 쓰이고 있는 동안에는 ‘울레골’ 내지 ‘위례성’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의 두번째 도읍지가 풍납동(風納洞)이 틀림없다면, 그곳의 옛 지명에 ‘울레’(慰禮)와 같거나 그것과 유사한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국도였다가 다른 데 옮긴 뒤에도 그 이름을 그냥 둘 수는 없으니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야 했는데, 이왕이면 전에 이름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뜻을 가진 이름을 택하였을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사이의 지명 변천사를 보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고유 지명을 그대로 두고 그 음이 당시의 지배층어의 무슨 뜻에 해당하는지 보아서 그 뜻에 알맞은 한자어로 개명하였던 것이다. 첫번째 국도였던 위례성(慰禮城)은 蛇山<신라>稷山<고려>으로 변해 간 것이 확실하다. ulle>üre(慰禮. [주] 慰의 한자음의 자연 변화로)와 유사한 소리를 가진 터키어로서 나쁜 뜻을 가진 yïra(-n)(蛇)가 있어서 ‘蛇山’이라고 개명하였다가 고구려의 후신을 자처한 고려는 자기 조상들의 국도였던 곳이 나쁜 글자로 이름 지어진 것을 그냥 둘 수 없어서 üre(國)와 그 음이 유사하고 좋은 뜻을 가진 것으로서 당시에 쓰이고 있던 ‘稷’(기장)을 뜻하는 옛터키어-ügür/üyüri(cf. üyüri>üüri>üri)의 발달형 üri(稷)로 다시 바꾸어서 ‘稷山’으로 개명한 것이다.

그런데 마침 풍남동(=바람드리)의 옛지명이 옛지도에는 ‘虵山’(‘虵’는 ‘蛇’의 속자임)이고 풍납토성도 ‘바람드리성’이라고 한다(『한국지명총람』1권 서울편. p.116. 한글학회. 1966). 그렇다면 ‘바람드리’(=風納洞)이라는 말의 유래는 ‘얌들’(蛇坪)의 와전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어떻든 직산의 옛 이름-蛇山이 慰禮城으로 소급되는 지명이라면, 풍납동도 蛇山에 소급하는 동시에 BC.1세기 경의 유물이 나오는 토성이니, 이것도 ‘慰禮城’으로 다시 소급될 수 있는 곳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본시 위례성(=國城)을 ‘蛇城’(사성)으로 개명할 때에는 정복자인 신라가 나쁜 뜻으로 ‘蛇’를 뜻하는 yïra(-n)로 붙였으나 고구려의 후신을 자처하던 고려초에 와서 본디 이름인 ‘위례’에 가까운 몽고어로써 ‘바람 불다’를 뜻하는 몽고문어-üliye(>üle>üre)의 발달형-‘위레’(üre)로 바꿔서 ‘강변의 바람이 거센 들’임을 상징하는 ‘風坪’이라고 쓰고, ‘위레-골’이라고 읽었던 것이다. ‘바람 불다’를 뜻하는 ‘윌예>위레’가 사어(死語)가 되면서 조선시대에 와서 한자어 ‘풍’(風)에 끌리어서 그것을 ‘(風)-드르(坪)’라고 읽게 되고, 그것이 다시 음운 변화를 입어서 지금의 ‘바람드리’ 즉 ‘風納’이라고 쓰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한국지명총람』(서울편)에서처럼 ‘얌(蛇)드르>(風)드르>바람드리’의 음운변화로는 보기 어렵다.

그리고 아마 백제시대나 고려초의 지도나 지리책이 발견되면, 그 자리에 옛 ‘慰禮城’이란 말이 발견될 것이다.

이제까지 한 글을 요약하면 첫째, 풍납토성은 제2차 위례성이 분명하다.(BC.6년부터 AD.371년까지 약 380년간의 백제 도읍지) 둘째, 이 지명은 ‘慰禮城’(울레골‘國城’)>위례성<한자음의 변화>→蛇(유라[yïra]-산)<凶名으로 폐기>→風坪(윌예-드르>위레-드르→-드르)>바람드리(風納洞)와 같이 변해 내려왔다. 셋째, ‘慰禮城’의 본디 뜻은 몽고어 기원의 ‘國城’(수도)의 뜻이다.

百濟國 溫祚王의 建國 첫都邑地는 天安에 있는 稷山 慰禮城이 분명하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유료기사 결제하기 무통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가장 많이 본 뉴스

종합 뉴스 라이프 우리동네 향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