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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학도 청소년의용군

김성열 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장

등록일 2012년06월27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1950년 6.25전쟁은 인민군이 일방적으로 도발한 남침으로 어처구니없이 같은 민족끼리 서로 싸우고 해친 동족상잔 전쟁이었다. 따발총 현대 무기와 전차 242대, 장갑차 208대, 중장비로 무장한 보병 15만과 공군기 230대 압도적 무력으로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에 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열세로 몰린 국군은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후퇴 지연작전으로 급급하여 사기가 극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이때 나이어린 학도의용군 약 5만 명이 지원 반공구국전선에 참전하였다. 그리고 7천 여 어린 꽃송이가 호국영령으로 산화하였다.

천안농업중학교 재학생 이름마저 모르는 천안의 아들 두 어린 꽃송이가 있었다고 하나 확인되지 못했다. 이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이 또한 훈장도 없이 오직 애국충정의 일념에서 싸웠으니 이는 세계 전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일로서 길이 빛날 우리 민족 얼의 상징이었고 만방에 과시할 우리 청소년학도의 기개라 하겠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자 피난길에 나섰던 서울 시내 각 대학학도호국단 간부 단원 200여 명이 수원에서 회동하고 비상 학도대를 조직하여 6월 29일에 국방부 정훈국의 지도 아래 처음으로 종군하게 된다.

나라가 긴급한 사태에서 애국학도들은 실전 부대에 참전한 것이 학도의용군의 발단이었다. 이 사실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의분에 찬 애국학도의 가슴마다 메아리 처 자진하여 궐기 참전하였다.

7월 1일 대전에서 많은 피난 학생들이 모여 대한의용학도대를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참전하였고, 7월 19일 후퇴하여 대구에서 활동하는 대한의용학도대와 부산에서 활약하는 학도의용대가 통합하여 전시학도 조직체로 학도의용군이 되었다.

학도의용군은 각 전투사단부대에 배치되어 용전분투하였다. 대원들 중에는 중학교 2ㆍ3학년(당시 6년제)의 어린 학생들로부터 여학생도 상당수 달했다고 한다. 출전이 허용되지 않는 어린 대원들은 선무 공작 일선위문 전시동원 등으로 참가했다.

개인별로 혈서지원, 가두지원, 가두모병으로 정규부대에 참전한 애국학도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것이다. 학도의용군은 유격대로 다대한 전과를 세웠고 학도의용경찰대로 낙동강 방어전투에 참전하여 큰 전과를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수복 후에는 종군 인민군공비 소탕작전에 참전하고 후방치안 확보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훈공작국민반공사상 무장에 앞서 공헌했다. 특히, 국군이 북진하여 수복한 지역에서는 애국학도들이 학도의용대를 조직하여 군 작전 수행을 지원했다. 1.4후퇴 때 남하하여 학도의용군(평양, 청진, 함흥)으로 종군한 수가 일천여 명에 달한다.

또한 재일동포 학도들이 자진 참전을 결의하고 일본 각지에서 7백여 명이 UN군을 통하여 학도의용군으로 참여하였다. 조국의 위기를 구하고저 용감하게 참전한 애국 충정과 단결력은 우리 민족의 기개이다. 이들 호국의 얼은 오늘도 초연이 가시지 않은 어느 전선 그 어느 곳에 잠들고 있을지 헤아릴 수 없으나 그 숭고한 정신은 살아 있는 우리들 심장에 시대정신으로 역동하게 해야 한다.

한편 대한민국 땅에서 자유 대한국민 청소년학생으로 부모 슬하에서 살다가 인민공화국 79일 치하에서 인민위원회 정치보위부에 강제로 동원되어 의용군에 징집된 청소년들이 있었다. 이들은 북한으로 교환될 인민군 포로는 아니다. 포로 교환 원칙에서 예외인 특별한 사례이다. 자유대한민국의 17세 청소년학생들까지 강제로 의용군으로 끌어간 인민공화국은 청소년의용군들 수천여명을 최전선 낙동강 전투에 총알받이로 배치했었다. 살아남은 인민군 청소년의용군 이들도 인민군 포로이지만 북한으로 교환될 인물들은 결코 아니었다.

살아남은 의용군청소년들은 인민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의용군청소년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철저하게 수모를 당하고 포섭 공작에 말려들었다. 이 청소년의용군들은 인민군 포로에 포함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사실이었다.

6.25전쟁 인민군 포로 교환수에는 해당될 수 없는 포로들이었다. 1953.6.18.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자유석방 영단은 청소년의용군들이 극적으로 은혜를 받은 것이다. 어처구니없이 인민군청소년의용군 포로가 되었다 자유 석방된 억울하고 원통한 인민의용군 포로였다.

아직도 반공 그리고 자유, 통일은 우리시대의 정신이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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