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학 후보의 고향은 아산군 송악면의 광덕산 밑이다. 외암민속촌에서도 공주쪽으로 6㎞ 더 가야 하는 오지마을. 그곳에서 넉넉하지 못한 농가의 6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꼴을 베거나 땔감을 구해오고 농사일을 거들어야 하는 궁벽한 산골마을에서 공부하기는 쉽지 않은 일. 나름대로 수업시간에 집중하는 습관을 들여 제법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서울사대 일반사학과에 합격했지만 휴학계를 내고 재수를 해 다음해 법대생의 신분으로 서울대학교에 다시 들어가게 됐다.
1972년 당시는 유신체제로 나라 전체가 엄격히 통제되고 살벌한 분위기였다. 그런 속에서 자유와 민주를 향한 대학생들의 도전과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겁이 많았던 그는 민주화 투쟁의 당위성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참여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법학에 대한 실망이 법학공부를 게을리하게 됐고, 그 결과 두 번에 걸쳐 응시한 사법고시에 그의 이름을 볼 수 없었다.
취업준비를 하는 단계에서 자연스럽게 방송기자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컬러TV방송을 시작하며 기자 등 방송인력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MBC에 입사해 사회부와 보도제작부를 거쳐 1986년 정치부 기자로 입문했다.
하필 이 무렵부터 대한민국의 정치계에 일대 격변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직선제 개헌쟁취투쟁이 전개되면서 전두환 대통령이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호헌조치를 발표했고, 이어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대표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열심히 일(봉사)하다 보면... 세상은 좀 더 밝아질려나
그가 방송기자로 활동하던 80·90년대까지 방송의 대중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권위주의가 팽배한 위정자들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정권의 입맛에 맞게 통제되고 가공된 정보만을 홍보차원에서 나팔을 불어대던 정치뉴스의 최일선 전달자 시절이기도 했다. 전 후보는 당시를 ‘소위 정권의 발바닥도 핥고 빨아주는 빨대기자 시절이었다’고 밝힌다.
조폐공사 사장으로의 전용학 후보
시대가 지나면서 5공 언론체제가 무너지며 새로운 매체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그도 새로운 세계에 도전해보고 싶어 10년 가까이 몸담았던 MBC를 떠나 신설 세계일보 기자로 취재일선에 나섰다. 하지만 재단의 편집국 개입사태가 발생하며 동료기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됐고, 전 후보는 SBS로 자리를 옮겼다. 93년 3월 중순부터 김영삼 대통령의 청와대 출입기자가 됐고 이후 4년간 청와대를 출입하며 역사의 현장을 지켰다.
전용학(1952.11.28.) |
▷ 출생지와 현주소: 충남 아산 / 충남 천안시 동남구 청수동 263
▷ 가족관계는: 배우자와 2녀
▷ 존경하는 인물(또한 천안지역에서 존경인물): 김구, 반기문(천안 유영완 목사)
▷ 천안에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가장 보여주고 싶은 곳: 유관순열사기념관
▷ 좋아하는 연예인과 정치인 각각 한 명씩, 이유는: 이효리, 박근혜
▷ 로또 50억에 당첨되면: 미래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복지 기금으로 기부
▷ 지금 당장 죽는다면 남길 유언: 항상 남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 애창곡은: 노사연의 ‘님그림자’
▷ 취미는: 독서
▷ 좌우명은: 뿌린대로 거둔다
▷ 주량 및 흡연랑: 소주 2~3잔 정도/ 흡연 안함
▷ 좋아하는 음식은: 물김치/ 자장면
▷ 건강관리는: 등산
▷ 나만의 유행어나 금지어: 감사합니다 / 비어
▷ 재산신고액(동산, 부동산 등 내역): 7억5814만원
▷ 소유자동차(차량이름, 연식, 배기량): 그랜져 XG/ 00년식 2000cc
▷ 선거자금조달(자비:후원금): 자비 및 후원금
▷ 요즘 잘 보는 방송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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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뉴스 앵커로 낙점되고 하루하루 편치 않은 시간이 흘러갔다. 가뭄에 콩나듯 두자릿수 시청률이 나오면 마치 앵커가 잘해서 그런 것 같고, 반대로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선후배·동료들에게 죄를 지은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불과 2년이 채 못되는 기간동안 앵커를 맡았지만 그 기간은 외롭고 고통스런 자리였다.
방송인으로, 정치인으로 살아온 날을 돌아보며 두가지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국민의 눈 역할을 다했던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의 입 역할을 다했던가 하는 것이다. 한 차례 국회의원을 지냈고 두 차례 총선에서는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혹독한 네거티브에 시달려 낙선했을 때는 ‘내가 왜 이 길을 택했는가 후회되기도 했지만, 언론인·국회의원·CEO의 길을 걸으며 무언가를 해냈을땐 보람도 컸다.
인생은 늘 세 번째 기회가 온다고 하지 않던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눈과 입의 역할을 할 기회가 다시 올 것이라 믿는다.
“이번 4·11 총선은 동남구를 잃어버린 12년으로 만들 것인지 결정하는 중요한 날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희망입니다. 사람을 바꿔야 동남구가 바뀝니다. 천안의 새로운 광역시 시대를 열 수 있는 기회의 날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