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도 두 개, 책상도 두 개, 밥통도 두 개… 심지어 냉장고도 두 개다. 17평짜리 아파트 비좁은 공간. 방이 한 개인 것은 불행. 결국 고심 끝에 거실을 둘로 갈랐다. 거실 한 켠을 방으로 쓰려니 불편한 게 한두건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길쭉·협소해진 거실은 그야말로 복도와 다름없다. 송월선(70)씨와 김춘자(72)씨가 함께 사는 집의 형편.
남남이 살다보니 맞춤소원이 생겼다. “제발 집만 좀 넓었으면.”
갑자기 이들이 가진 사연이 궁금해 진다.
송월선(좌)씨와 김춘자씨가 성무용 시장에게 자신들의 사연을 들려주고 있다.
송월선씨와 김춘자씨는 각각 러시아 사할린에서 태어나 60여년을 살아왔다. 한번도 한국땅을 디뎌본 적 없는 사할린의 ‘토박이’. 하지만 부모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한국은 정서적으로 고향같이 느껴지는 곳.
90년대 초반 한국정부의 배려로 송월선씨 어머니는 대구의 대창양로원으로, 김춘자씨 어머니는 인천 사할린복지관으로 떠났다. 자녀들이 모두 사할린에서 살고 있건만 고향땅에서 죽고 싶다는 소망이 이뤄진 것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어머니. 송씨와 김씨는 무척 섭섭했지만 부모들이 평생 한국을 얘기하
며 그리워했던 것을 기억하며 이해했다. 몇 년이 지나자 그들 또한 한국땅에서 어머니도 만나면서 살고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질때, 한국정부로부터 1945년생 이전에 태어난 사람에게 특전이 주어졌다. ‘부부나 홀로된 둘이 17평에서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
그런 인연으로 2009년 12월 남남이던 송월선씨와 김춘자씨가 한국 천안에 와 함께 살게 됐다.
“하지만 우린 분명히 방이 두 개라 알고 왔어요. 각자의 생활이 있는데 어찌 방이 한 개인 겁니까. 잘못된 거예요.” 송월선씨는 처음 한국정부가 조건을 말할 때 방이 두 개인 집이라 알고 신청했다고 했다. “예, 맞아요. 분명 두 개죠.” 김춘자씨도 맞장구쳤다.
남남이 함께 사는 것이 때로 얼마나 불편한지를 몸소 아는 이들. 3년을 살아왔지만 다시 3년을 이렇게 살기는 너무 힘들 거라는 사실이다. “잠자는 시간이 달라 텔레비전을 켜놓지도 못하구요, 새벽에도 잠이 깰까 무척 조심스러워요. 17평이 작진 않아요. 부부라면.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생활을 존중해야 하는 남이라구요.”
그런 것들은 참을 수 있다고 하자. 송월선씨는 “어머니가 오셨다가 불편해서 가셨다. 사할린에서도 가족과 친척들이 찾아오지만 우리는 서로 불편해진다. 부부들은 매년 한두차례 방문도 하고 즐겁다지만, 우리같은 남남들은 보고싶어도 오는게 부담스럽다. 그래서 못오게 한다”고 말하는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
송월선씨는 성무용 천안시장이 사할린동포들과의 대화 자리에서 이같은 문제를 하소연했다. 경청하는 자세로 이야기를 들은 성 시장은 “정부측에 알아보겠다”고 관심을 표명했다.
이들은 집 한쪽에 간직해 둔 서류뭉치를 꺼냈다. 거기엔 외교통상부, 충남도청, 천안시청, 국회의원 등에게 보낸 편지와 답장이 모여있었다. 물론 답장은 ‘어렵다’는 것, ‘우리 소관이 아니다’라는 것 등 부정적인 내용들이었다.
김춘자씨는 넌지시 그들같은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남남이 우리같이 살다가 마음이 안맞아서 하나는 다른데로 가버렸어요. 그래서 17평 혼자 사는 분도 있죠. 어찌 보면 비극이에요.”
이런 문제로 혼자인 사람들은 사할린에서 짝을 찾아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송월선씨와 김춘자씨는 이구동성 같은 얘기를 한다.
“우리같이 남남이 와서 함께 살 경우엔 방 두칸짜리(21평~23평)를 내주시든가 아니면 각각 좀 작은 평수라도 편히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해요. 14명 정도면 혼자 사는데도 궁색하진 않을 거 같아요. 제발 부탁이니 단계적이라도 해결해주길 바랍니다. 천안의 경우 50여가구중 8세대가 남남이에요. 1년에 두세세대라도 이같은 문제를 해소해주신다면 바랄 게 없겠습니다.”
<김학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