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성거산 위례성 학술회의’가 지난 22일(목) 천안박물관에서 열렸다.
천안시가 주최하고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이 주관한 이날 학술회의는 초도 위례성과 관련해 다양한 시각에서 고찰하고 토론했다. 변평섭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은 “아직 초도지로서의 위례성에 대해 확실한 고고학적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며 “하지만 지속적인 조사와 연구를 통해 천안의 역사적 정체성을 세우고 문화적 자긍심을 찾는 계기가 되길” 희망했다.
위례성 관련 학술회를 방청한 사람이 70여명으로 적은 것은 무척 아쉽다.
제1주제/ 천안지역의 산성과 초도위례성
제1주제는 김병희 중원문화재연구원이 맡고, 윤종일 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 연구원이 토론자로 나섰다. 김 연구원에 따르면 천안은 마한의 중심지로 목지국의 치소가 있던 것으로 비정되며, 또한 고구려와 삼국시대 말기에는 신라와의 국경선이 있던 것으로 당시 치열한 각축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천안지역의 지표조사를 통해 나타난 산성은 모두 28개소. 이중 17개 산성은 백제~나말여초기에 축조된 고대산성이며, 나머지 11개소는 중세 이후 축조된 피난형 성격이 높다.
그는 천안의 산성들을 모두 4가지로 구분했다. 첫째 천안지역 시가지와 풍세면 일대는 해발 150m 이내의 낮은 구릉에 축조된 토축성(일부 석축)으로, 군사적 목적으로 백제시대에 축조된 수규모 군대가 주둔한 보루다. 둘째는 동부지역에 해당되는 곳으로, 해발 200~250m 이내의 낮은 야산 정상부에 축조됐다. 이곳은 동쪽 신라와의 국경선에 해당하던 접경지대로, 백제 성곽들이 대부분이다.
셋째 남북으로 뻗어있는 차령산맥의 높은 산줄기로, 해발 500m 이내에 축조된 위례산성, 성거산성, 흑성산성이다. 이곳들은 퇴뫼식 형태의 석축성으로, 조망이 매우 좋으며 백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유물이 다양하게 수습됐다. 넷째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사산성과 목천토성으로, 조사결과 기단석축을 가진 판축토루임이 밝혀져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평산성 형태로 추정된다.
김 연구원은 “위례성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한성백제기까지 소급되는 유물이 일부 출토되고 있지만 아직 이와 관련되는 유구는 없다”며 “따라서 초도 위례성과 관련해 뚜렷한 역사규명은 이뤄지지 못한 상태”임을 전했다.
제2주제/ 천안 고대분묘의 사적의미
제2주제는 공주대학교 이남석 교수가 발표했다.
이 교수는 천안지역의 문화유적 현황과 관련해 “다른 지역보다 풍부한 것으로 보긴 어렵지만 시대상을 추론할 정도는 가능하다”고 보았다. 천안에서 지금까지 발굴한 조사결과 230여개의 유적이 확인된다. 이중 대다수는 조선시대의 것이고, 일부가 선사시대, 고대, 고려시대 등 비교적 다양한 내용을 보인다.
천안지역의 고대 분묘유적은 약 20여지점. 하지만 실제 발굴조사된 유적은 7개 지역이며, 이들은 원삼국기의 것과 백제시대의 것으로 구분된다.
삼한시대에 경기, 충청, 전라지역은 마한지역으로, 54개 소국이 있었고, 그 중심을 목지국을 지목하는데 그 위치가 직산으로 비정한 바 있다. 그러난 최근의 고고학 활동증가는 오히려 천안 이외의 지역에서 목지국을 추정하는 경향이 많다. 더불어 삼한사회의 발전을 토대로 성장된 삼국시대의 역사 정황을 고려하면 천안은 당연히 마한의 범주, 즉 백제에 합병된 마한지역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삼국시대의 천안은 지속적으로 백제의 강역에 자리했을 것으로 보는데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다만 어느 시기에 공식적으로 백제의 영토에 편입됐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봤다.
제3주제/ 성거산 위례성 관련자료 분석
천안 성거산 위례성 관련자료 분석’은 천안향토사학회 소속의 임명순씨가 나섰다.
그에 따르면 백제의 첫도읍지 위례성에 대해 삼국사기는 ‘그 위치를 모른다’ 했고, 삼국유사에서는 그 위치를 ‘직산’이라 했다. 하지만 다산 정약용이 삼국사기와 여지승람을 재해석해 직산이 백제의 첫 도읍지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다.
주장의 근거로는 첫째 ‘하남 위례성’의 지명을 한강 남쪽의 위례성이라 해석했고, 둘째 ‘부아악’을 여지승람의 기록대로 서울의 삼각산으로 고정시켰다. 이런 이유로 다른 위치로 해석할 수 없게 해 주장을 합리화하고 있다.
임씨는 “그러나 온조왕 24년에 강을 건너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다산 정약용은 위치비정을 먼저 하고 나중에 기록된 사건을 해석해 다분히 자의적”이었음을 주장했다.
그는 “첫 도읍지인 위례성은 지금의 공주지역이 마한의 땅이므로 강을 건너온 위치이고, 일백리 동북쪽 방향의 땅을 주어 살게 했다는 위치로는 안성천으로 볼 수 있으며, 공주쪽에서 동북쪽 일백리 떨어진 지역으로 보면 지금의 직산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제4주제/ 전설을 통한 위례산성과 백제사와의 관련성 고찰
제4주제는 황인덕 충남대학교 교수가 맡았다.
먼저 위례성과 관련성을 전하는 지명과 전설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고 있다. 온조왕묘, 제원정, 진앙정골, 단고개, 지질캥이, 용샘, 부소문이고개 등 많은 지명이 있다. 이들 특히 고려시대 왕건 관련 지명이 천안시와 목천읍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황 교수는 “천안이 왕건 관련 지명의 중심지가 되고 있는 것은 이곳이 후백제와의 접경지이자 고려 남진 전쟁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점에서 당연한 결과”라고 봤다.
전설에는 과장과 왜곡, 허구가 개입되지만 그 속에 의식이 가미된 사실과 역사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위례성 전설은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의자왕이 위례성에 와 7일간 단식하며 지냈다는 내용도 있고, 용샘을 통해 밤이면 부여에 가서 놀다 낮이면 위례성에 와 정사를 돌봤다는 얘기도 있다. 황 교수는 “의자왕 이야기는 오랜 인물전설치고 그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고 구체적이어서 실제사실에 가깝고, 용우물은 완전 허구성으로, 오래된 민간사고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추정했다.
전설로서의 천안에 대한 영향력은 백제시대가 더 강했다. 이는 백제가 천안지역을 지배했던 시기가 오래였던 점으로 이해된다. 특히 실질적인 백제사의 영향이 이뤄진 것은 가장 심각했던 전쟁시기, 즉 백제 최후기였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황 교수는 “전설로서의 위례산성 이야기는 철저하게 백제 말기의 의자왕을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인용변신이나 우물을 통한 부여 왕래, 공주와 사위의 임금 모해 등의 전설은 부여권에서 전승하는 것과 흡사하다는 것. “이곳에서 보여주는 전설은 백제 최후기에 부여와 이곳이 아주 중요한 연관관계에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으로써, 매우 중요한 특징”이라는 그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그럴 만한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토론자로 나선 이정우(천안향토사학회)씨는 “전설내용들이 제한적으로 언급된데 대해서는 다소 아쉬움이 있다”며 “현존하는 유적을 대상으로 이처럼 긴 세월동안 다양한 해석이 가해진 경우는 드물며, 이런 점에서 위례성이 지닌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말했다. 그는 성거산 위례성이 국가유적으로 정비되고 관리돼야 한다는 점도 밝혔다.
<김학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