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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의거 순국 金永基(김영기) 학생을 호명하고 추모하다

<김성열 칼럼 기고>

등록일 2011년12월09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1960년 4월 28일 상오 10시 30분 천안역 광장에서 재경학생을 비롯하여 시내 중·고등학생 천여명이 4.19순국학생 김영기(金永基)군의 추도식을 엄숙히 거행하였다.(동아일보 1960년 4월 29일자 보도)

천안 출신으로 유일한 4.19의거 순국학생 김영기는 4.19학생의거날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진압 유탄에 맞아 영예롭게 순국하였다. 1960년 4월 19일 학생 데모에 참가한 재경 천안학우회 학생들은 고려대, 연세대, 중앙대, 한양대, 동국대 재학들로 알려졌다.

김영기 이력

 

성명 : 金 永 基(김 영 기)
본적 : 논산군 소아면 462
주소 : 천안군 입장면 유리 123
생년 : 1940. 2. 28
본명 : 金 博 光(김 박 광)
직업 : 입장양복점
1946. 9. 1 입장국민학교 입학
1952. 3.27 입장국민학교 졸업
1953. 1. 1 입장감리교회학생회장
1959. 3. 1 서울중앙신학교 입학
1960. 4.19 4.19학생 데모 중
국회의사당 앞 광장 진압 유탄 순국1965. 4.19 태조산 천안의 얼 탑
호국영령강령비 명각

1960년 4월 28일 순국 김영기 학생 추도식은 재경 입장학우회(회장 박동인 동국대 법과)가 주최했고, 사회는 유병규가 진행했다. 특히 천안씨알농장 함석헌 선생이 추도사를 하여 더욱 뜻있고 엄숙했다고 전해온다. 재경 천안학우회(회장 윤수호 고려대 정치과)학생들 다수가 참가하고 천안농고, 천안공고생들 대다수가 참여했다. 순국 김영기 학생은 1940.2.28 입장면 유리 123에서 입장양복점을 자영하는 아버지 김학성씨와 어머니 유복렬 여사 슬하에 5형제 중 둘째이다.

1952년 3월 27일 입장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입장감리교회에서 학생봉사 신앙생활하면서 독학을 하여 서울중앙신학교에 입학했다. 재경 입장학우회 회장 박동인씨가 전하는 말로는 순국 김영기 학생 가족들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유족들은 셋째 金英基(교사)씨, 넷째 金仁基(사업)씨, 다섯째 金鍾基(사업)씨가 천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4월 18일 고려대 학생 데모로 발원한 학생 데모는 4월 19일 서울시내 모든 대학으로 파급되어 궐기하였으며, 앞 다투어 사방에서 국회의사당, 중앙청 쪽으로 몰려들고 경무대로 진입하려 했다. 중앙청 앞 광장에서 진입을 저지하려는 진압 위협 발사한 유탄은 데모대 앞에선 학생들을 피투성이로 만들고 쓰러지게 했다.

평화 시위 데모 학생들은 피 묻은 희생 학생들의 교복을 흔들어 대며 흥분하였다. 마침내 데모 학생들의 절규가 격렬해지고 남녀 고등학생들도 데모대에 가세하게 되었다. 전국대학으로 확대된 3.15정부통령부정선거 규탄 데모 구호는 “부정선거 다시 하라”, “부정선거 원흉을 처단 하라”를 시작으로 “자유당 독재정권 물러가라” 그리고 “이승만 독재정권 물러나라”, “이승만 하야하라”는 구호만큼이나 정국은 온통 혼란에 휩싸였다.

4.19학생 데모는 국부 이승만 박사를 4월 26일 하야시켰다. 그리고 “국민이 원한다면 물어나야지” 독립운동가 이승만 박사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그리고 하와이로 물러나게 하는 한 역사의 시대정신이었다.

역사는 4.19학생데모를 4.19학생의거 4.19학생혁명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순국 김영기 학생은 수유리 4.19학생 추모묘역에 안장되어 있으며, 찬 비석에는 앳된 사진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천안태조산 천안의 얼 탑 호국영령강령비에는 그 이름 김영기가 명각 되어 있다.

새삼 밝혀진 천안 입장 김영기 순국학생을 호명하고 추모한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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