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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안창호 목사

<역사칼럼/ 김성열 천안역사문화연구실장>

등록일 2011년09월06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내 육신은 하늘의 소명에 의해 하와이에 있으나 마음과 정신은 조국에 있으니 유체를 한국에 안장하기 바란다.”

 

죽사 안창호 목사는 천안, 전의, 공주만세운동 주동인물로 1919년 공주에서 5월20일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안창호 목사는 1903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감리교 공주지방 윌리암 선교사 어학 선생으로 충남과 인연이 되었다.

안창호 목사는 1883년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출신이다. 1906년에 공주영명학교를 설립하는 윌리암 선교사를 도우면서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공주읍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 윌리암 선교사 어학선생으로 1911년부터 천안지역을 순회하면서 천안지역의 정서를 잘 파악한다.

천안읍감리교회 담임 목사로 1915년 12월23일에 파송받으면서 천안지방 활동이 정착되었다. 이미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안태국 선생들과 구국운동 자금조달에 협력해 온 터에 천안지방 선교활동은 민족자주독립 정신 개명 의식화운동이 되었다.

1915년 당시 일제는 모든 단체 활동을 단속하고 지도자들을 감시하는 철저한 헌병 감찰통치를 했다. 그래도 교회 활동은 자유를 주었다. 천안지방은 감리교 선교지역으로 유관순이 다니는 갈전(병천) 지령리교회, 수신 장명교회, 북면 매송교회, 직산교회, 양대교회, 성환 율금리교회가 매일학교, 주일학교를 열고 한글과 조선 역사를 교육했다.

천안지방감리교회 지도자들이 천안 영진, 갈전 진명, 수신 장명, 목천 보명, 입장 광명학교를 설립하고 개명 교육에 앞장섰다. 천안읍감리교회 담임 안창호 목사는 천안지방 개명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선구자였다. 한글을 가르치고 영어를 배우게 하고 이스라엘 민족 역사를 통해 한국민족 역사정신을 일깨웠다.

서릿말 천안읍교회는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천안역, 직산역이 개업되면서 전의, 평택, 안성, 진천교회까지 연결하였다.

안창호 목사의 큰 딸 안예나가 유관순과 같이 이화학교 짝꿍이었다. 유관순 가족들은 천안읍교회 안예나 가족들과 형제들같이 어울렸다. 안창호 목사의 투철한 민족 자주독립 정신은 하와이 친구들과 연락하면서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드디어 1919년 3월1일 서울만세운동을 기화로 천안지역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극비리에 교회들 조직이 가동하기 시작했다. 천안 목천 유림 지도자들도 합세했다. 목천 헌병대가 가장 가까워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목천 보통학교 학생들 172명이 제일 먼저 만세를 외쳐대며 헌병대 앞을 지나 동네로 쏟아져 나왔다. 김소용, 이규태 학생대표가 추진한 천안지역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 3월14일 만세거사였다.

한동안 준비됐던 만세거사는 3월20일 입장ㆍ양대 광부 광명학교만세, 3월24일 입장 장터만세, 3월29일 천안읍내장터만세 그리고 4월1일 아우내장터만세 의거 그리고 전의, 공주, 아산으로 확대되었다.

안창호 목사는 공주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천안에는 얼씬 거리지 못하게 감시받아 진남포 교회로 강제로 이임하게 된다. 끝내 안창호 목사는 일제 감시에 못 이겨 하와이로 떠났다. 1925년부터 하와이에서 임시정부의 어려운 재정을 지원하는 거룩한 거사를 추진한다.

 

미주 하와이 단체연합운동 윤봉길, 이봉창 거사 자금 후원 등 민족을 위해 큰 몫을 했다. 민족해방직후 백범 김구 선생은 안창호 목사를 서둘러 만나 그 고마움을 전하고 기념으로 휘호를 주었다.

 

安昌鎬 雅正 誓海魚龍動 盟山巾巾 木知

忠武公 李舜臣 詩 一句 白凡 金九

 

독립운동가 안창호 목사는 하와이 교포사회연합 임시정부 후원자였으며 충남공주, 천안에서 10년 동안 암울한 땅에 개명의 밝은 횃불을 들었던 선구자였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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