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사당이 천안 직산에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직산읍 판정리(산직촌)에는 백제 시조 ‘온조왕 사당’이 있었다. 정유재란(1597년)때 왜병이 불을 질러 태웠다. 1603년 충청감사 유근이 온조묘를 다시 세우기를 청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다시 세웠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온조왕묘는 백제초도 위례성이 ‘천안 직산’이라는 점을 방증한다. 온조왕묘는 온조왕의 흔적을 당시 인정했다는 것이다. 천안 직산과 위례성에 대해 현 사가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
천안 직산의 위례산성은 삼국유사, 동국여지승람, 세종지리지 등 각종 역사서에 백제의 첫 도읍지로 기록돼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온조왕묘는 어떤 이유로 직산에 세워졌는가 하는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여하튼 천안시 역사문화연구소에 따르면 지난 4·5월경 온조왕묘 터로 추정되는 부지 약 8만㎡가 매매돼 매수인이 물류창고로 추진하려 하고 있다. 자칫 주변개발로 백제초도와 천안의 상징적 문화유산이 파괴될 가능성이 높다. 이같은 사실을 접한 향토사가들은 조속한 온조왕묘 복원을 위해 시의 체계있는 관리·운영이 필요하다는 주문을 낳고 있다.
산직촌 묘터추정현장 ‘백제토기 발견’
지난 6월30일 온조왕묘 2차조사에 나선 관계자들.
천안시 역사문화연구실(실장 김성열)은 직산 온조왕묘의 정확한 위치를 찾았다고 했다. 거의 10년 전 한 향토사가에 의해 제시됐으나 개인의 주장으로 축소해석하며 공식적으로 조사된 바 없었다.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판정리(산직촌) 산24-19번지 일대로 추정되는 온조묘터가 지금은 포도밭으로 변해 있었다. 그곳에서는 왼쪽으로 위례산성(523m), 오른쪽으로는 성거산(579m)이 보였다.
지난 5월1일 1차 조사에 이어 6월30일 2차 조사에는 서정호 공주대교수를 비롯해 황환경 천안시 문화재팀장, 이종택 학예사, 윤종일 역사문화연구실 직원, 황서규 천안향토사가 등이 직산읍 판정리 현장을 찾았다.
현장조사결과 백제시대로 보이는 다수의 토기파편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지름이 22㎝에 달하는 항아리 파편은 3~4세기 백제시대로 추정, 청당동 유적지 유물과 흡사하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고려청자 밑바닥 파편도 나왔다. 조선시대 기와편은 많은 양을 보였고, 연대미상의 묘지석과 기단석도 발견됐다.
지름 22센티나 되는 백제시대(3~4세기) 추정 항아리 파편도 나왔다.
공주대 서정호(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백제에서 통일신라시대 고분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천안시 역사문화연구실의 윤종일씨는 “일부 유물편으로 온조왕묘 터일 가능성은 충분해보이지만 좀더 세밀한 지표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온조묘터로 추정되는 용안치 아래 약 15만여㎡ 주변은 일부 벌목과 개간 등으로 현재 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역사문화연구실은 온조왕묘로 추정되는 곳이 이같이 훼손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토지주가 고의적인 산림법(문화재법) 위반으로 멸실·훼손된다 해도 처벌이 상대적으로 미약하고, 원상복구 명령이 내려진다 해도 멸실된 후라 그 역사적 근거를 찾기가 매우 곤란한 상황으로 관계기관의 총체적인 대책수립이 하루빨리 요구된다’고 밝혔다.
인조17년 온조묘 남한산성으로 이전
온조묘는 조선 세종11년(1429년)에 건립해 1597년 정유재란때 소실된 것으로 전한다. 그러다 1603년 온조묘 건립제의가 있었지만 인조17년(1639년)에 남한산성으로 이전,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려실기술’에는 인조 병자년(1636년) 남한산성에 온조묘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인조 15년(1637년) 예조가 “온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해 그 역사가 가장 오래 되었는데 반드시 그 신이 있을 것이다. 옛사람은 군사작전을 벌이며 주둔할 때에 반드시 그 지방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온조왕에게 제사지내는 일을 그만 둘 수 없을 듯하다”는 기록이 있다. 인조 17년에는 남한산성에 사당을 세워 온조왕을 제사하고 위판을 고쳐써서 ‘백제시조왕’이라 칭했다 한다. 병자호란때 군사작전을 수행하면서 무사기원을 바라는 차원에서 온조왕묘를 창건했을 가능성을 엿볼 있다. 온조왕묘에서 숭렬전으로 바뀐 것은 정조때의 일이다. 광주판관 이시원이 아뢰길 “본부에 백제시조의 사당이 있는데 아직도 그 이름이 없으니 외람되다” 하니 정조가 하교하기를 “역대 후왕을 제사지내는 곳에는 모두 부르는 이름이 있으니 ‘숭렬전’이라 하라” 했다. 이후 숭렬전은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임금이 남한산성에 행차하면서 치제를 올리게 했다.
천안시는 2010년 9월16일 500여년만에 ‘온조대왕 제향’을 봉헌했다. 이는 ‘2010세계대백제전’의 천안 위례산 혼불채화가 확정된 걸 계기로 삼아 천안시장 등 21명이 참여해 전통유교제례방식으로 실시했다. 시는 향후 온조왕 사당을 복원하고 제례시행도 검토중에 있다.
<김학수 기자>
황서규씨 최초주장 ‘온조묘는 산직촌’
10년 전 ‘직산현지도’에 정확한 위치 추정, 한때 무연묘 거대봉분도 존재
온조묘로 추정되는 곳은 지금 포도밭으로 변해있다.
‘최초의 온조전은 직산 산직촌(山直村)에 있었다.’
이같은 제목으로 천안문화원의 향토문화자료에 올린 것은 황서규 천안향토사 연구위원(성환문화원 이사·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었다.
온조가 열사람의 신하와 함께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했고, 하남위례가 지금의 직산이라는 점은 많은 역사서가 기록하고 있다. 특히 세종대왕은 재위11년에 직산땅에다 온조전을 짓게 했다. 1967년 정음사에서 발행한 세계연표에 보면 ‘BC18년에 비류·온조 형제가 미추홀과 위례성에 각기 이르러 왕을 칭했고 고온조 백제시조 국호십제라 하였다. BC5년 1월에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했다.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 이성산성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에 의해 백제초기 한성백제의 수도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499년 발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온조왕의 사당이 ‘현청에서 동북간 3리에 있는데 세조11년에 처음 세웠고 춘추로 향축을 내려 치제했다’고 했다. 온조사당이 있는 건 밝혔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었다. 직산현지에는 온조묘의 유지가 ‘용안치 중봉’으로 기록돼 있다.
황서규씨에 따르면 2000년 초만 해도 직산땅 산직촌 마을 옆 넓은 밭 가운데 거대한 무연고 봉분이 있었다. 연고자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찾을 수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장이 건립되면서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봉분이 있는 곳은 용안치 중봉, 온조전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에서 약 100m 남쪽방향으로 기억했다.
그는 규장각에 보전돼 있는 ‘직산현지도’에서 온조전의 옛 터를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 지도에 의하면 당시의 관아 규모와 위치, 각 마을과 인구, 농경에 필요한 저수지, 산, 도로 등의 위치가 명확하게 표시돼 있다. 그에 따라 지금의 직산읍 판정리(산직촌·용안치 중봉)로 확신했다.
천안문화원의 고전문화연구회에서는 2001년 4월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직산관아에서 조촐하게 제사를 지냈고, 이후에도 온조제를 지내왔다.
황서규씨는 “지금이라도 온조전을 다시 세우고 백제창업의 정신을 기리는 온조대제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학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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