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시민들은 ‘고려시대의 천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부모가 있고 조상이 있듯,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지난 24일(금) 천안박물관에서 의미있는 역사알기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오후 1시에 ‘고려시대 천안의 역사적 위치’란 주제로 학술세미나가 열린 것. 충남역사문화연구원과 중세사학회, 천안박물관이 공동주관한 이날 세미나는 오후 6시까지 장장 5시간의 강의와 토론이 이어졌다. 비록 50여명의 시민·관계자가 방청했지만 열기만큼은 장내에 뜨거웠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과 중세사학회, 천안박물관이 공동주관해 ‘고려시대 천안’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학술세미나가 24일(금) 천안박물관에서 열렸다.
그동안 충청남도는 백제문화권 및 내포문화권, 기호유교문화권 개발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다. 하지만 고려시대사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낮았다는 지적에 따라 충남의 고려시대사에 대한 재조명차원에서 추진됐다. 게다가 충청남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통한 전통문화의 계승이라는 차원에서도 고려시대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이번 천안지역 고려시대 역사·문화적 성격 규명을 시작으로 그동안 연구와 활용이 미흡했던 충남의 고려시대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변평섭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장은 개회사를 통해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고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길목에 해당되는 고려시대를 이해해 천안역사의 정체성을 간직한 발전적 미래도시로 발돋움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한규 천안시부시장은 “이번 세미나를 통해 고려시대 천안의 역사적 위치를 재조명하고, 문화유산의 체계적인 보존관리와 관광자원 인프라가 구축될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축사에 나선 이정신 한국중세사학회 회장은 “백제문화화권이나 기호유교문화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고려시대 천안을 종합적으로 검토한다는 점은 연구자 입장에서도 매우 기쁘다”며 “이제 중앙중심 역사연구에서 한발자국 물러나 소외됐던 지역이나 인물사 연구는 우리 역사학자들의 임무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고려시대 연구 ‘천안거점에서 출발’
제1주제 ‘충남지역 고려사연구의 현황과 과제’는 윤용혁 교수가 맡았다.
윤 교수에 따르면 고려시대 충남연구는 불과 10여년의 연구축적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미흡한 수준이다. 이같은 연구의 미미함은 고려시대 지역사 연구와 활용을 통한 지역에서의 공헌이 그만큼 미약했음을 의미한다.
충남지역의 고려사 연구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첫째 지방관아, 치소, 향·소·부곡을 포함한 고려시대 지방제도 연구가 보다 깊이 있게 이뤄져야 한다. 둘째 근년에 관심을 끌고 있는 연안해로 문제에 대해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연해지역의 수중발굴은 다양한 고려시대 자료의 생생한 보고가 되고있어 연구의 심화가 필요하다. 태안지역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를 설치하는 것도 고려시대 연구의 진흥에 도움이 클 것이다. 셋째 충남지방에 풍부하게 소재한 고려시대 사원유적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이같은 연구 이외에도 지역사의 소재를 지역사회의 도시개발 혹은 문화적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고려시대 연구자들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윤 교수는 “향후 천안지역이 충남에 있어서 고려시대 역사 소재를 보다 적극적으로 개발·활용하는 지역거점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 천안은 930년 8월8일(음) ‘천안부’ 설치로 도시 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천안이야말로 고려의 성립·통일과 궤를 같이 해 성립한 고려의 전략도시였기 때문이다.
8개 속군현 거느린 천안도독부
‘천안도독부 성립과 군현제 변화’(김갑동 대전대교수)에서는 고려 태조 13년(930년)에 처음 설치된 천안부의 성격과 의미, 군현제의 변화상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고려태조가 천안에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한 배경은 후백제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으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여기서 군사를 훈련하고 군량미를 확보했고, 이후 본대와 합류해 일리천 전투에서 승리하고 황산군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아냈다. 후삼국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후 천안부는 성종 14년 환주로 개명되었다가 현종 9년 다시 천안부가 됐다. 이때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8개의 속군현을 거느리게 됐다. 이들 속군현은 천안에 도독부가 설치된 후 통제를 받았던 인근 지역으로, 온수군(현재의 온양), 예산현, 그리고 멀리 떨어진 청양현까지 이른다. 참고로 천안부의 속현이던 안성현은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군으로 승격, 주군으로 독립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시대에는 충청도가 아닌 경기도에 속하게 됐다.
천안부원부인 ‘천안과 어떤 관계?’
제3주제는 이정란 고려대학교 교수가 ‘태조비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과 천안부’라는 주제로 천안부원부인과 천안부와의 관계를 조명했다.
천안부원부인은 경주를 본관(本貫)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강주와 천안을 연고지로 하고 있는 임언의 딸이다. 그런데 고려초의 원부인(院夫人)들은 대개 자신
뜻깊은 학술세미나에 50여명뿐인 방청객은 아쉬움을 던져줬다.
의 출신지를 원호(院號)로 삼고 있는 것에 비해 천안부원부인은 출신지가 아닌 천안으로 원호(院號)를 삼고 있다. 이는 임연이 제3의 연고지로 천안을 선택하였음을 말해 주는데, 이는 천안이 임언의 가계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는, 그야말로 연고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천안이 군사적 거점이자 지리적 요충지이면서도 토착세력이 강고하지 않다는 점도 선택의 요인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자신의 후손들에게 재지기반을 마련해 주고 싶은 태조의 입장에서 볼 때 천안은 매력적인 지역이었을 듯. 천안부원부인의 원호로 경주나 강주가 아닌, 천안이 채택된 데에는 이와 같은 사정이 있었다.
천안에 녹아있는 태조와 불교
‘고려시대 천안지역 사찰의 건립과 성격’을 제4주제로 택한 문철영(단국대학교) 교수는 천안지역에 다수의 사찰이 건립되는 배경을 살폈다. 또한 만일사, 성불사, 홍경사, 광덕사 등의 건립과 운영문제를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고려를 세웠던 왕건 태조는 신심이 돈독한 숭불의 왕이었다. 왕건의 불교관은 왕들의 귀감이 되도록 내린 ‘훈요십조’에도 잘 나타나 있다. ‘국가의 왕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불교사원들을 창건하고 주지들을 파견해 불도를 닦음으로써 각각 자기 직책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다’란 내용으로 시작한다.
태조는 방대한 비보사찰을 수없이 세웠다. 비보사찰이란 풍수상으로 취약한 곳을 부처의 힘으로 보완한다는 뜻이다. 왕건은 이러한 풍수지리설을 통해 각 지방의 호족이나 일반 백성의 인심을 모으고,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연결하는 데도 적극 이용했다.
만일사와 성불사도 ‘오룡쟁주지지(五龍爭珠之地)’로서의 천안과 연결된 비보사찰의 성격을 띠고 있다. 천안을 중시했던 태조는 도선국사의 비보사찰설에 따라 천안에 사찰을 세워 국가를 비보하는 곳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태조가 유숙했다 해서 ‘유려왕사’란 사찰을 세웠고, 그의 말이 머물렀다 해서 ‘마점사’란 사찰도 생겼다. 태조는 특히 성거산에 천흥사를 창건해 산신과 부처의 음조를 바랬다. 또한 성환에 위치했던 ‘홍경사’는 현종이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기념해 지은 사찰로, 불교신앙과 함께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사찰 옆에 ‘광연통화원’이란 객관을 함께 짓도록 한 것이 그같은 사실을 방증한다.
한편 신라시대(흥덕왕7년·832년)에 지어졌다는 광덕사는 진산화상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광덕사의 동쪽에 만복사, 북쪽에 개천사 등 광덕산은 산내의 큰절들이 바둑알처럼 펼쳐져 28방 89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광덕사는 대장경을 소장하고 있던 귀중한 사찰 가운데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