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박물관은 지난 3일 오후 2시 ‘천안의 마한·백제’ 기획전을 갖고, 이어 오후 3시부터 관련 세미나를 열었다.
제1주제는 이남석(공주대 사학과) 교수가 ‘천안지역 고대유적의 현황과 의미’를 다뤘고, 제2주제는 이현숙(공주대박물관)씨의 ‘천안지역의 백제 한성기 지방영역’ 그리고 제3주제는 정상기(국립청주박물관)씨의 ‘천안지역 백제시대 출토 중국도자’.
특히 이남석 교수의 주제발표를 통해 천안지역의 고대사가 갖는 의미와 당시 현황을 추정, 천안의 역사를 엿볼 수 있어 좋은 시간이 됐다.
천안 용원리 등에서 출토된 중국제 청자나 흑자는 백제왕실에서 지방의 유력자에게 사여한 위세품으로, 이를 매개로 지방사회를 통제한 것으로 여겨진다.(천안 용원리 출토 ‘흑유계수호’)
마한·백제 영향권인 천안
천안은 한반도 중서부지역에 자리한 행정단위지역으로, 한반도 거의 중심부에 자리해 한민족의 파란만장한 역사 전개와 결코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천안지역의 지정학적 환경은 한반도를 무대로 전개되는 역사현실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삼국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쟁패를 거듭하던 고대사회에 천안은 교통, 지리적 환경에서 중심적 위치가 아니었기에 크게 주목되지 않았다.
천안지역은 삼한 혹은 삼국의 실상을 전하는 중국기록이나, 삼국사기 등 국내 문헌사서에서 그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최근의 고고학 활동결과는 선사시대는 물론이고 고대사회에 천안지역의 역사적 위상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천안이 가진 자연과 지리적 환경은 인문환경, 특히 교통환경에서 크게 극복된다. 천안은 천안삼거리로 매우 유명한 지역이고, 이는 조선시대에 수도인 한양에서 호남과 영남에 이르는 길목이 천안이었던 것과 관련 있다.
고려시대 천안부의 성립은 통일신라 말기의 후삼국간 쟁패, 특히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 견훤간 투쟁과정에서 고려 왕건의 전략적 입지로 천안이 자리매김되는 것과 관련 있다. 즉 개경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한 왕건과, 전주 일대를 장악하고 웅거하던 후백제의 견훤은 후삼국의 패권을 위해 치열한 전투를 전개함에 있어 대체로 차령산맥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갈렸고, 당시 북쪽에서 남진하던 고려는 천안지역을 전진기지로 삼으면서 전략적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것과 무관치 않다.
지리적 환경으로 볼때 천안은 원삼국기에는 마한, 삼국기에는 백제에 포함됐다. 이렇게 볼때 천안은 마한지역과 백제국이란 역사체의 범주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삼한 혹은 원삼국시대는 약 300여년간 존속했다. 그 기간동안 마한지역은 소국들간 연맹체적 성격을 가진 정치체로 결합했고, 소국간의 우열관계가 형성됐을 것으로 본다. 그 중심을 목지국으로 보는 것이 일반이다.
목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전북 익산설, 충남 공주설, 천안 직산설, 경기 광주설, 경기 인천설, 충남 예산설, 안성설로 갈린다. 특히 천안지역에서 원삼국시대 관련 고고학적 성과들의 산출을 기회로, 이 지역이 원삼국시대 중심적 지역인 목지국이 위치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삼한사회의 발전을 토대로 성장된 삼국사회의 천안지역은 마한을 장악한 백제의 영역에 포함됐을 것으로, 삼국시대의 천안은 지속적으로 백제의 강역에 자리했을 것으로 봄에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백제와 천안과의 관련문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는 또다른 한계가 나타난다.
백제 초기 천안 일대의 지역은 백제와 마한과의 접경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비교적 일찍이 천안 이남지역으로 진출하고 있어 천안지역은 일찍부터 백제의 영향하에 있었음은 추정할 수 있다. 4세기에 천안지역의 부상은 한강유역에서 백제의 성장과 그 세력의 남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4세기에 천안지역 세력의 부상은 갑작스럽게 이뤄진 것 보다는 이전의 원삼국기부터 존속한 세력집단을 추정할 수 있으며, 이들은 백제가 한성에 도읍하던 4세기에서 5세기 후반까지 천안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입각해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을 것으로 본다.
천안이 475년 고구려의 남침 결과 고구려의 수중으로 떨어졌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적극적 증거는 없다.
<김학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