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하는 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의 ‘인연’ 중에서
피천득의 수필 ‘인연’은 교과서를 통해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천안에 사는 고요 유진석(82·영성동) 선생도 올해 시조집을 내며 ‘인연’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굳이 피천득의 인연과 비교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2009년 한해동안 썼던 시조작품을 망라한 가운데, 그중 ‘인연’이란 작품에 애착이 간 까닭”이라지만 그의 삶 면면에서 ‘인연’에 깊은 철학적 가치관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 진정한 이유랄까.
피천득의 ‘인연’이 남녀간의 애틋한 관계를 소재로 했다면, 유진석은 보편적 인연으로 틀을 넓혔다. 수필과 시조라는 점에서도 차이를 구분하지 않더라도, 인연에 대한 시각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한다. 아니, 어찌보면 보편적 인연 속에 남녀간의 관계도 한 부분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둘은 닮았다.
유 선생이 바라보는 인연은 한마디로 ‘관계를 이어주는 가교’다. 인생이라는 틀을 제시하지만 대상을 한정하진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을 ‘관계’로 보지 않고, 관계의 연속성인 ‘인연’으로 규정했다. 그같은 사고는 ‘내일은 어떤 인연으로 가슴앓이하게 될까?’란 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인연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닌, 관계 속에서 스스로 엮어내는 것. 그렇기에 가급적 만남 자체가 긍정적 관계를 지향하길 원하고 있다. ‘포근한 햇살로 맞는 고운 인연 널렸으면…’이라는 마지막 말은 그런 지향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얼마전 기자의 이메일에 낯선 이의 글귀가 눈에 띄었다. 기사에서 다룬 어떤 이의 연락처를 묻는 것이었는데, 아주 오래전의 사사로운 인연을 아주 간절히 그리워했다. 그후 알려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정성들여 표현한 글을 보내왔다.
가르치는 삶에서 ‘봉사하는 삶으로’
피천득의 ‘인연’에 등장한 장소가 일본이었음을 상기할 때 재일교포로 일본에서 태어나 18세때 8·15 해방을 맞아 이듬해 1월 귀국한 그와도 우연인지 닮아있다.
그의 삶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태생에서부터 시작된 비꼬임은, 모국어를 전혀 모른 채 귀국한 그에게 난제였던 한국어 학습이 결국 ‘국어교사’로 43년6개월을 보내게 했다. 천안지역에서만도 성거·성환·신방국민학교는 물론, 천남·성환·천안여자중학교와 천안여자·성환축산고등학교를 전전하며 수많은 제자를 뒀다.
“97년에는 성거국민학교 제자들이 고희연 겸 10권전집 출판기념회를 열어줬고,신
구시청 재래시장길 외환은행 옆에 위치한 오룡작은도서관에는 유진석 선생이 기증한 책들을 볼 수 있다.
방국민학교 제자들은 가끔 보은행사를 열어주기도 합니다. 제자에게서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는 교사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리보면 교사가 된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그가 펴낸 39권의 저서중에 12권이 ‘가르치는 것이 내 보람이기에’라는 제목의 책이다.
정년퇴임을 하고서도 그가 간 곳은 천안노인복지관. 무료 한문강사로 9년의 세월을 보냈다. 연극반을 두어 연극지도도 함께 했고 때론 ‘어린이 서당’도 열었다. 가르치고 쉽고 배우기 편한 교재 ‘한문교실’을 자비를 들여 펴내는 그의 열정에 감복했음인지 인쇄업체 사장이 300권을 무료로 내준 적도 있었다. 바르게 살았고, 2남2녀를 효자·효녀로 훌륭히 키워온 ‘경력’에 힘입어 그간 결혼식업체를 통해 500여회 주례를 선 점도 그에겐 소중한 인연들.
2009년 여름문턱에서 그는 또다시 오룡작은도서관 무보수 관리업무를 맡아 하루의 반나절을 보내고 있다. 풍세 작은도서관에 82세 봉사관리자가 있지만, 집나이 83세인 그가 1살이 더 많은 이유로 천안의 최고령 도서관관리봉사자라는 기록도 갖게 됐다.
“앞으로도 아내와 건강하게 지냈으면….” 하지만 3·4년이 지난 어느 때에는 자녀들이 있는 서울로 올라가야 될 것이란 생각에 ‘과연 정든 천안을 떠날 수 있을까’ 걱정도 된단다. “지금 생활에 아주 만족하는데…, 그런데 아내가 몸이 많이 아파요. 내 나이도 적은 것이 아니고 해서…, 그 때쯤이면 둘이 생활하는게 힘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천안은 그를 잃는 것이, 그를 떠나보내는 것이 ‘인재를 잃는 것’과 같게 될 거다.
<김학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