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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전도사 “배운 게 이거라고…”

화요데이트/ 심홍식(65·전 죽전원 원장)

등록일 2010년11월17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고령화, 고령화 하잖아요. 나, 안사람, 노모 이렇게 우린 노인네 셋이 삽니다.”

심홍식씨가 사는 목천읍 서흥리 햇빛 잘 받는 전원주택을 찾았다. 그는 기독교 사회복지사업 지원을 받고 있는 지혜의 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적·발달장애 영역에서 특수교육과 재활상담을 하고 있다. 또 충남신학교 기독교 복지학 겸임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보다 ‘전 죽전원장’으로 소개하면 금방 안다.

“기껏 70도 안되는 나이로 저 앞 경로당에 가기가 쑥스럽다”는 농담과 함께 시골생활의 유유자적(안빈낙도)함을 밝힌다.

죽전원장으로 있을 때는 매양 바빠서 원내 얘기만 하던 그가 살아온 삶을 조근조근 이야기한다. 거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가을햇살이 적당히 따스하다.

“당시가 70년 늦봄이었나 했을 거에요. 서울 봉천동은 이른바 달동네라 해서 어려운 삶을 살고있는 사람들 속에서 3년쯤 불우청소년사회교육기관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고등공민학교 전수학교라 불렀는데, 어려운 여건의 아이들이 대개 공부할 환경이 안되었죠.”

젊은 혈기에 사회정의가 어떻고 하는 때였고, 총각이어서 무서운 게 뭐 있었을까. 교실에 침대를 갖고 들어와 아이들 교육에 전념하며 살았다. 교육방침은 ‘체벌’ 위주. 그때 아이들은 커서도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이 “이유도 모르고 맞기만 했던 것 같다”고 주장(?)한다.

“그런게 있었어요.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당시엔 체벌이 가장 효과가 있었죠. 그래도 결석이라도 하는 아이가 있으면 그 집 대문 앞에서 늦은 밤까지 기다리다 학교로 끌고왔죠. 그렇게 해서 아이들은 검정시험을 보고 상급학교로 진학하며 인생을 재설계했죠.”

그때 가르친 아이들이 지금은 40·50대가 되어 매년 스승의 날이면 50여명이 음식점을 통째로 빌려 너댓명의 스승을 대접하고 있단다.

75년도쯤 우리나라 마지막 왕후였던 이방자 여사와의 인연이 닿은 것도 그의 일생을 사회복지쪽으로 틀게 된 이유가 됐다.

“당시 외국유학을 준비중인데, 한 대학교수가 좋은 구경 시켜준다며 데려간 곳이 수원의 자애학교였죠. 공사중에 있는 건물이었는데, 바로 이방자 여사가 설립중에 있는 학교였어요.”

자연스레 소개가 됐고, 그곳에서 특수교사로 근무하게 됐다. 당시는 젊고 키도 훤칠해서 이방자 여사의 ‘궁중의상발표회’에도 모델로 서게 됐다.

“자금마련을 위한 전국순회행사였는데, 당시 앙드레김 같은 분들이 참여했고, 창경궁 무대에선 당시 최고배우들이었던 문희, 남정임, 남궁원 등과 함께 무대를 밟았죠.”

지금 회상해도 대단했던 추억이다.

장애학생들을 가르치며 보람있었던 일 한가지를 소개했다. “그들에게는 공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즐겁고 희망을 갖고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중요했죠. 그래서 생각한 것이 리듬합주부였어요.”

이방자 여사께 부탁했다. 일본에서 천황직계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이 여사는 곧바로 일본에서 최고의 악기들을 공수해 줬다. “아이들은 음계 자체를 몰랐죠. 계명지도도 안돼 머리쓴 것이 악기 위에 번호를 붙여주고 따라 연주하게 했죠.”

6개월 후 강당에 사람들이 가득 찼다. “참, 신기하대요. 연습때는 그렇게 말 안 듣고, 엉망이던 것이 무대 위에서는 전혀 딴 판이었던 거에요. 아이들은 120% 능력발휘를 하고 잘 끝냈죠.”

그때 배운 것이 있다. 100%의 능력이 있더라도 못가르쳐서 50%밖에 못내는 사람은 50점이지만, 50%의 능력을 맞춤교육을 통해 50% 전부를 끌어낼 수 있다면 그건 100점짜리란 것을. 당시 장애학생들의 학부모들이 감격해 운 것은 당연했다.

이후 전국 리듬합주경연대회에서도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장애학생들은 난생 처음으로 상이란 것을 받아본 것이고, 그 기억은 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다.

그때를 계기로 특수교육에 시쳇말로 미치게 됐다는 그. 현재 아내도 당시 악기연주 보조로 도와주던 동료선생이라며, 참 신기한 인생의 인연에 감복할 뿐이라고.

주몽특수학교 교장에다, 출강, 교육부 심의 등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르게 생활하다 보니 문득 과로에 의한 의사경고가 찾아왔다. 할 수 없이 건강상 이유로 모든 것을 접고 천안에 내려온 게 96년도쯤. 그리고 곧바로 죽전원 원장으로 근무하게 됐다.

“매일 죽전원 뒷산을 오르락내리락 했고, 원우들과 함께 먹고, 자고, 뒹굴고 하다 보니 깨끗이 치유되더군요. 그것도 참 신기해요.”

그렇게 그들과 10년을 보냈다. 2000년 초 2년간 외유한 적이 있었는데, KBS ‘내일은 푸른하늘’이란 프로그램에서 한 부분을 맡았고, 장애영·유아치료교육센터에서 프로그램 자문과 연구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2007년 12월 말에 죽전원을 떠나 흙냄새를 접하며 시골 전원생활을 즐기며 소일하며 지낸다는 그.

“살다보니 퍼뜩 깨달아지는게 있습디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관계이자 소통이라구요. 시민은 시민대로, 행정은 행정대로, 장애인은 장애인대로 생각과 방식이 다 다를 겁니다. 모두 더불어사는 사회를 지향하는데 많은 다툼이 야기되고 있죠.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고, 노력한다면 문제와 갈등은 저절로 풀리게 되는 것이죠.”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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