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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목천의 ‘목주가’를 찾아 ‘호미도 날이언 마라난’

사모곡으로도 널리 알려진 고려가요… 아버지보다 지극한 어머니 사랑 표현

등록일 2010년09월28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사모곡 내용을 담고 있는 표석 천안에서 지방도로 북면 가는 길. 왼쪽으로 독립기념관 입구로 들어가고, 오른쪽으로는 목천TG가 나오는 사거리를 불과 수십미터 지나면 왼쪽으로 작은 공원 하나가 눈에 띈다. 공원이라야 사람들의 발걸음을 찾아보기 힘든 곳. 숲 속 분지같은 공원에 들어서면 체육시설 하나 없는 텅 빈 광장이지만, 각각 한 개의 표석과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그 유명한 ‘목주가(사모곡)’다.

옛날의 천안 목천은 목주로 불렸다. 그곳에도 수많은 전설과 민담 등이 후대로 전해지는데, 특히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것이 ‘목주가’다. 학계에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목천의 목주가는 ‘사모곡’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사모곡은 소박한 표현과 애절한 한이 사람의 마음을 끌어 널리 애송돼 왔다. 신라속악의 형태를 닮아 고려초기 작품으로 추정한다. 악장가사, 시용향악보, 안상악보 등에 작가, 연대미상의 고려가요로 전하고 있다.

목주 효녀설화는 목천 현지에도 수록돼 있으며, 얼마 전까지도 목천 동리의 부모들이 젊은이를 훈계할 때 목주설화를 이용하곤 하였다. 목주효녀 설화는 이 고장 천년의 세월동안 효행의 귀감으로 전해오는 설화이다.
 

목천에서 시작된 ‘사모곡’

목주라는 고을에 효녀가 살고 있었다. 효녀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다. 목주효녀는 천성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해 어린 나이지만 후모를 친모처럼 섬겨 어렵고 험한 일을 서슴지 않았다.

계모는 목주녀가 총명하게 자라는 것이 싫었다. 남편의 재산이 목주녀에게 돌아갈까 몹시 염려했다. 그 때문에 항상 목주녀의 비행을 남편에게 고해바쳐 목주녀가 아버지의 미움을 사도록 했다.

계모의 구박은 이에서 그치지 않았다. 음식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 목주녀는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허드렛일만 고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목주녀는 천성이 착한지라 아버지의 심사가 상하실까 하여 일체 고하는 일이 없었다. 계모가 거짓으로 고해바쳐 아버지의 매를 맞아도 변명하지 않고, 그저 잘못했노라고 사죄할 따름이었다.

목주녀의 아버지는 매우 완악한 사람으로, 앞뒤 분별력이 없었다. 목주녀의 아버지는 이렇게 착한 계모에게 불공스럽게 대하는 딸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계모의 충동에 아버지는 집안을 망하게 하는 딸을 내쫓고, 대문을 걸어 잠갔다. 울며불며 애원해도 문을 열어주지 않자 목주녀는 집둘레를 뱅뱅 돌다가 기회를 보아 다시 들어가 정성껏 집안일을 도왔다.
 

목주가 얘기가 전해오는 장소 공원에는 목주가 표석과 모녀 조각상만 덩그러니 서있다.

아버지와 계모의 행패는 더욱 심해졌고, 아버지는 “이년, 나가지 않고 또 들어와서 집안 망하게 하려느냐”며 동구밖까지 내몰았다. 어찌할 수 없게 되자 걷다걷다 새벽녘 목주녀는 기진맥진하여 땅에 쓰러졌다. 석굴에 홀로 살고 있는 노파가 이를 발견하고 처녀가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둘 수 없어 등에 업고 집에 돌아왔다.

몸이 낫자 노파는 목주녀의 처지를 듣고 “서로 의지해 살자” 하였다. 목주녀는 노파를 친어머니처럼 극진히 모시니 노파도 목주녀를 친딸처럼 사랑하게 되었다. 이렇게 친모녀처럼 지내는 동안 객지에 나가있던 노파의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노파는 성혼할 때가 된 아들을 생각하고, 목주녀와 짝지워줬다. 부부는 열심히 일해 몇해가 지나자 동리에 졸부로 소문이 날 만큼 윤택해졌다. 천수가 다한 노파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가 타계했다.

친정아버지와 계모에게 학대받다 못해 버림까지 당했지만 효심이 지극한 목주녀는 자나깨나 두고 온 아버지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딸을 내쫓은 후 매사에 잘 되는 일이라곤 한가지도 없던 계모는 쓰임새 또한 커서 가산을 탕진하고 이제는 끼니조차 어렵게 지냈다. 소식을 접한 목주녀는 조석에 밥이 목에 넘어가지 않는 듯 괴로웠다.

목주녀의 신랑되는 사람도 본시 착한 품성을 지녔는지라 친정아버지와 계모를 모셔왔다. 피골이 상접했던 아버지와 계모는 목주녀의 극진한 공경에 날이 갈수록 화색이 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옛 성품이 되살아난 계모는 “이렇게 윤택하게 살면서 부모봉양이 소홀하다” 했고, 꼬드김에 넘어간 아버지는 딸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지성을 다해도 아버지와 계모의 불평은 날로 더해갔다. 목주녀는 자기 먹을 것 안 먹으면서 극진히 모셨지만 아버지 내외의 심사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하루는 김을 매러 밭에 나갔다가 해가 서산에 기울며 너무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 목주녀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어린 목주녀를 무척이나 사랑했었다. 반대로 땅의 정성을 조금도 몰라주는 아버지가 야속했다. 아버지도 어머니와 다름없는 부모이건만 어찌 어머니 사랑은 그렇게 두텁고, 아버지 사랑은 그렇게도 얇은가. 목주녀는 어머니를 그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 노래는 ‘목주가’라 하여 오늘까지 전해 내려온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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