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여기가 천안 원일면 댓거리였어. ‘터대’자에 ‘클거’자로, 터가 큰 마을이라는 얘기야. 요 동네, 윗동네, 저 윗동네까지 모두가 댓거리였지."
호두재배자, 김철구(69)씨는 광덕2리 마을회관 건너편 삼거리에 자리잡은 정자에 올라 신문을 떠들어본다. 예전같으면 수확기를 한달쯤 남겨둔 이 때에 바쁜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요즘은 천하태평. 그 덕에 청설모는 더욱 극성으로 호두를 훔쳐간다.
“이젠 나이도 많고, 젊은이는 없고, 산 속의 호두나무는 너무 자라 따기도 힘들고 그래. 나뭇가지가 풍성해지다 보니 나무 사이를 넘나들기 쉬워진 청설모의 세상이 돼버렸어.”
한때 전국 생산량의 80%를 책임지던 광덕호두는 아직도 ‘호두 하면 천안광덕’을 말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지금은 김천(연간 331톤)이나 영동(216톤)에도 훨씬 못미친다. 인근지역 공주마저도 연간 51톤의 생산량을 자랑하며 버젓이 산림청 통계에 잡혀있는데, 천안은 산림청 통계에도 잡혀있질 않다. 부끄럽다.
“그래도 천안은 호두 시배지라 해서 수백년전부터 내려온 전통이 있지. 이것만은 다른 지역이 따라잡지 못할 거야. 내가 이 땅에 태어나기 이전인 아버지의 아버지대에도 호두는 자랐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기억이 나. ‘서울에서조차 광덕호두를 사러 온다’고. 호두나무만 봐도 전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인정받는데 이의가 없을 거야.”
6·25전쟁때였던가. 한 떼의 국군이 이곳을 온 적 있다. 아름드리 호두나무를 보고 ‘M1소총으로 쏘면 나무가 뚤릴 것인가’를 내기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65년도만 해도 길 양쪽으로 200년도 더 된 호두나무들이 즐비했었어.”
그런데 66년도였나. “어디서 느시랭이(이곳 어르신들은 호두나무 해충을 그렇게 불렀다)가 엄청나게 나타나 나무를 갉아먹어 죽였지. 살아남은 나무들도 몇 년이 안돼 큰 한파에 다 죽었어.” 200년도 더 된 나무들이 맥없이 쓰러졌다. 이제 호두나무를 큰거리에서 보기는 힘들어졌다. 산속에나 가야 아름드리 호두나무가 아직도 예전의 번영을 알려주며 가지를 뻗고 있다.
“개네(재래종)들은 알맹이는 자잘한데 맛은 엄청 고소와. 요즘 심겨진 나무들과는 다르지. 요즘건 알이 굵고 잘 깨지는 건 좋은데 예전것처럼 맛이 고솝지가 않아.” 물론 일반인들이 구별하긴 힘들다. 다소 호두 좀 먹어봤다는 사람들이 그 미세한 맛을 겨우 구분할 뿐이다.
호두나무가 자라기 좋은 토질이라지만, 영동이나 김천 등도 잘 자라나 보다. 토질에 따라 맛도 다르다지만 워낙 개량종들이 잘 나오다 보니 그게 그거다. 아주 작은 차이만으로 상품가치를 다르게 매기기는 힘든 것. 그러려면 보다 전문적인 연구·토론과 홍보가 필요하다고.
“시배지란 긍지를 놓치면 안돼. 가꾸고 보살펴서 후대에라도 천안 광덕호두가 으뜸이라는 점을 확고히 해나가야 해.”
광덕호두가 좀 더 번창하기 위해서는 해결돼야 할 숙제가 있다는 것이 김씨의 생각. 일단 호두를 키우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것도 젊은 사람들이 나서줘야 한다. 아무리 좋은 환경이 열려있어도 의지가 없다면 얼마 못가는 것은 인생경험을 들추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 또하나는 재배할 땅이 있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현재 광덕 주변의 산이 거의 대부분 사유림이고 보면 호두재배가 쉽지 않다. “주민중에 산을 갖고 있는 사람이 나를 포함해 몇 안돼. 나같은 경우 1000평에 100그루 정도를 갖고 있는데 한 2가마(40㎏들이)쯤 따나. 너무 산속에 있는 건 건들지도 못하고, 인건비도 안 맞아. 또 작황이 안좋으면 한 가마도 못딸 때가 있지.”
그래도 올해는 9월 초순 수확(매년 백로때)을 앞두고 ‘대풍’이란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 해 많이 열리면 나무가 터서 다음해는 안 열리고, 또다시 다음해는 힘을 복원한 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다고. “그래 지난해는 흉년이었고, 아마 내년에도 흉작이 되겠지.”
김철구씨는 해마다 20여그루의 묘목을 계속 심는다. 호두 시배지가 살아나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한그루라도 심다 보면 언젠가는 전국에서 으뜸가는 호두마을로 거듭날 수 있을 것라는 소망을 마음 한편에 그려본다. “모든 게 잘 될 거야.”
<김학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