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희 문학평론가(천안예총 회장)
운초 시인의 가르침
봄은 가고 꽃이 지니 야위는 얼굴/
다시금 다듬어도 꽃답지 않네/
못내 잊어 이 상사 못버린다 해도/
상봉보다 상사가 오히려 나은 것을/
만났던 옛 정보다 그리는 정이 더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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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광덕사 뒷산의 운초 묘역에서는 해마다 운초 추모제가 열린다. 십여 년 전부터는 아예 매년 4월 마지막 일요일로 추모제 날짜를 고정해 놓았다. 76년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35년쯤 되는 세월이 흐른 셈이다. 시낭송과 조촐한 공연을 열고, 다례제도 올리는 데는 지역 문인들과 다인(茶人)들의 노고가 컸다.
운초(雲楚)는 성천 출신의 기생이다. 여러 기생이 그러하듯 그녀 또한 용모가 빼어나고 음률에도 통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그녀가 생전에 천안에 두어 번 들렀다는 기록과 묘역의 소재지라는 것 외에는 천안과의 더 이상의 인연은 없다. 그런데도 천안 사람들은 수십 년 세월 동안 운초를 잊지 않고 제례를 봉행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기생도 아닌 터에 천안 예술인들의 마음을 붙잡아 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운초는 조선의 3대 시기(詩妓)로 평가된다. 송도 기생 황진이, 부안 기생 매창과 함께 운초도 그들과 어깨를 겯고 있는 것이다. 황진이는 몇 편의 시조 절창으로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시인이 되어 있다. 매창 또한 시조와 한시 70여 편을 남기고 있지만 두어 수 시조로 후세에 기억되는 시인이다. 그러나 운초는 350여 수의 한시만을 남기고 있다. 한시가 외면되는 세태를 사는 우리가 그의 시인됨을 알아볼 턱이 없는 것이다.
운초의 시인됨을 가장 잘 알아준 이는 평양감사로 부임했던 당대의 세도가 김이양 대감이다. 운초 또한 자신을 알아주는 김이양 대감을 지극한 마음으로 우러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시를 매개로한 사랑과 존경이 새봄처럼 싹텄을 터였다. 신분의 벽도, 나이테의 두께도 문제 될 리가 없었다. 나이로 치자면야 58년 세월의 강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것조차 사랑의 배를 띄워 가뿐히 건넜던 모양이다.
그러나 사랑조차도 인생사 순리는 어길 수 없었던 듯, 김이양 대감은 91세를 일기로 세상과 작별한다. 대감이 본향인 광덕산 산록에 묻힌 후 운초는 외로이 초당을 지키다가 5년 여 후 남편으로 섬기던 대감 무덤의 옆 골짝에 묻힌다. 정실부인과 합장된 남편의 발치 곁이라도 다가가고 싶어서 남긴 유언대로였다.
150여년이 지난 1974년, 작가 정비석은 조선일보에 명기열전을 쓰면서 운초의 묘를 찾아내 잡초만 우거진 봉분을 세상에 알렸다. 이 기사를 읽은 향토사학자 김성열 씨가 사재를 털고 협찬을 얻어 봉분을 단장하고 추모 사업을 시작해 운초는 천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1킬로미터 상거에 있는 김이양 대감의 묘소는 비석조차 사라진 채 무너져 내리고 있을 때 운초의 묘역에는 추모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당대의 대권력가 김이양의 묘소와 기생 운초의 묘소는 절묘한 대비를 보여준다. 김이양의 묘소는 백년도 못 돼 권력은커녕 그 무덤조차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 깨끗이 단장된 운초의 묘소에는 낭랑한 시울림이 퍼져나가고 다향이 초봄의 코끝을 스친다. 그래서 새삼 깨닫는다. 권력은 결코 예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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