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세월, 1시간만에 패쇄
대집행 통한 건물환수… 향후 유사문화기능 기대
5일(금) 오전 9시10분쯤, 행정대집행을 20분 남겨놓은 천안문화원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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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원 사무국장이 감사원에 문제제기한 불법의혹을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나섰지만, 이미 ‘혐의없음’으로 조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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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금) 행정대집행이 시작된 가운데 문화원 정문에는 회원 일동으로 걸어놓은 ‘천안문화원 정상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는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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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역업체가 문화원측 물품을 반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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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7월10일 천안문화원이 설립됐다. 그리고 2004년 7월10일 문화원 4층에서 ‘50주년 맞이’ 기념식을 간단히 가졌다. 민병달 문화원장은 백범 김구의 ‘공공의 자유’를 인용해 문화가치를 역설하며 “50년을 한결같이 해온 것처럼 또다시 새로운 천안의 미래를 위해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그간 천안시는 각종 전시활동과 음악회, 발표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전개해 왔으며 천안문학 38호, 향토사료집 22권 등을 발간했다. 향토사연구소를 운영하고, 향토사료관을 설치했으며, 14개 서클에서 500여 명의 시민이 문화를 즐겼다.
현재 성정동 천안문화원은 92년 9월 당시 전국 최대규모인 연건평 700평 건물로 이전한 이래 더욱 다양한 문화활동을 펼쳐왔다.
2006년 2월, 이정우 문화원사무국장이 시의원선거에 출마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20년을 넘게 사무국장 자리에 있던 이씨의 행보에 지역사회가 술렁거렸다. 하지만 곧 재보다 접었다. 40대 가장으로, 아직은 사무국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 정치풍랑을 맞기에는 모험이 크다는 이유였다.
돌이켜 보면 문화원 내 원장과의 갈등이 정점을 치닫는 상황에서 탈출구를 모색했던 듯. 2005년 2월 취임한 권연옥 신임원장과의 업무적 갈등은 출발선상에서부터 심하게 대립됐었다. 정확히는 신임원장과 기존직원간 마찰이었다. 회원 72명의 만장일치 단독추대된 권 원장은 당시 “새로움을 요구하는 시대에서 다양한 문화프로그램 구축이 시급하다”고 밝힌 바 있다. 3명의 직원을 향해 ‘특정인을 위한 문화원’으로 인식한 원장과 사사건건 ‘장’으로의 횡포에 시달린다고 생각하던 직원들. 결국 팽팽하던 기싸움은 여직원 인사 강등조치, 사무국장 이사회 징계, 직원에 대한 갖가지 제약에 따른 불만이 폭발하며 2006년 9월5일 ‘집단사퇴’하면서 파행이 시작됐다.
파행 키운 이사회 ‘역할 아쉬워’
‘별 것도 아닌 것이 연기만 모락모락.’
사무국장의 비리혐의를 조사해달라는 원장의 검찰조사 의뢰가 들어갔고, 여직원과 더불어 여강사는 ‘성추행’으로 원장을 고소하는 사태로 치달았다.
문화원장은 11월28일 불구속 기소됐고, 사무국장은 2007년 1월23일 업무상 횡령 및 배임, 사문서 위조, 위조사문서행사죄로 불구속 기소됐다.
2007년 4월 문화원장의 1심공판의 결과가 나왔다. 법원은 ‘목격자와 참고인들의 일관된 진술로 비춰볼때 원장의 여직원 성추행 및 강제추행이 인정된다’며, 하지만 피고가 고령인데다 문화원 발전에 노력해온 점을 감안해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이후 고법 항소와 대법원 상고는 모두 기각됐다.
한편 사무국장에 대해서는 2007년 6월, 일부혐의가 인정된다며 1심판결에서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2008년 6월 2심에선 일부 횡령과 배임죄가 말끔히 사라졌다. 달랑 천안시민의 상 추천인란에 원장 허락없이 도장을 사용한 것이 ‘사문서 위조’에 해당돼 ‘벌금 100만원’을 받았다. 재판부는 ‘하지만 원장 도장의 추천이 아니라도 시민의 상을 받는데 별다른 영향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결국 파행은 법적 문제라기보다 문화원 내 신임원장과 직원간 심각한 업무갈등이 주된 이유였다.
원장과 직원간 마찰로 인한 파행은 법적결과로 일단락되는 듯 했다. 원장은 성추행과 파행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 되었다. 이미 사무국장은 원장간 업무갈등이 파행이 된 점을 죄송해 하며 떠났고, 직원들도 집단사퇴 이후 문화원과는 일체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
파행의 한 축인 직원들이 모두 떠난 가운데 지역사회는 원장과 이사회에게도 응당 파행책임을 져야 한다는데 입을 모았다. 하지만 원장과 일부 이사들이 한통속이 된 문화원은 지역사회의 바람은 무시한 채 복마전 양상을 띄었다. 원장선출에 매달리면서 파벌과 절차적 정당성에 흠집을 내며 지금까지 ‘파행의 악순환’을 지속해 왔다. 그간 서너번의 원장선출과정과 두 번의 법원 파견 원장직무대행 체제가 진행됐지만 분란만 가중된 채 법적공방으로 문화원은 만신창이가 됐다.
<김학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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