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사람이 70까지 살기는 어렵다는 말로, 이백과 함께 시성으로 불렸던 두보의 시 ‘곡강’에 나오는 말이다. 물론 옛 일이고, 옛 말이니 지금 시대에 맞느냐 물으면 ‘턱도 없다’ 할 것이다. 옛날이야 평균수명이 50도 안되었지만, 지금에는 두배가 되는 80이 넘지 않는가 말이다.
하기사 십수년 전부터는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공감대를 얻고 있다. 실제 거리를 다니노라면 주유소에 아르바이트하는 이들이 70 다 된 분들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도 점점 노인들의 경륜을 높이 사고 있다. 더 이상 ‘경로당’이라는 곳에 가둬두려 하지 않는다.
70을 목전에 둔 김성열(69·목천읍)씨는 대표적인 선두주자다. 천안에서 한때 커다란 서점을 경영했던 그는 천안의 역사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활동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그 없는 천안향토사를 들먹이지 않는다. 경륜으로나 열정으로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감초같은 역할을 자임한다.
그런 그를 좋게 봤는지, 최근 천안시에서 그를 천안역사문화연구실의 연구실장으로 앉혔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공모조차 하지 않은 채 무혈입성했다. 연구실장이라봐야 계약직공무원 7급에 해당한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70을 코앞에 둔 나이에 다시금 인생의 정점에 서있을 수 있다는 건 아무나 못하는 거다.
천안박물관 2층에 버젓이 ‘천안역사문화연구실’이 있고, 그곳에 책상 하나를 두게 된 그. 당장 버들육거리 옆 그의 ‘천안화랑’을 정리했다. “10년간 무료로 얻어쓰고 있었는데, 더는 미안해서 못쓰지.” 그래선지 예전보다 훨씬 밝아보이는 모습, 목소리도 가볍고 경쾌하다.
월급도 나오고, 사무실도 가졌지만 정작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은 따로 있다. 그간 하고 싶어도 예산이 없이 못했던 수많은 지역향토사 관련업무를 이젠 맘놓고 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오히려 시행정이 ‘하라, 하라’ 등떠미는 격이니 얼마나 좋겠는가.
성무용 시장이 올해 화두를 ‘여호첨익’이라 했는데, 꼭 그를 두고 한 말 같다.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란 의미니, 적어도 역사문화와 관련해선 그에게 부합하는 말이다.
천안역사문화연구실의 가장 주요한 업무는 ‘천안시지 편찬’에 있다. 올해 본예산에 관련예산을 책정받지 못한 형편에서 첫 추경에 확보하려는게 시 문화관광과의 입장이다. 당초 2명의연구위원을 두려 했던 것도 예산상의 문제로 1명만 더 둔다는 방침이다. 8급대우에 능력있는 사람 뽑기는 이미 글렀다. 겨우 관련학과를 나온 자격요건을 찾는 것이 다다. 자칫 이름만 거창했지 껍데기로 전락할 수 있는 우려도 낳고 있다.
당초 이 방면의 한 관계자는 “역사문화연구실의 연구위원들은 박사급의 대단한 능력을 가진사람들로, 천안 역사문화를 정비함에 있어 중대한 업무를 관장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대우와 예산지원이 박하니 꿈도 못꿀 일이다.
“일단 열심히 해봐야죠” 말하는 김성열 연구실장은 벌써 시지편찬에 있어 나름의 구상을 짜내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천안의 정체성이에요. 그걸 찾아내야 합니다. 수많은 관계전문가들에게 물어봐야죠. 그들의 생각을 꺼내놓게 할 겁니다. 천안의 정체성에 대해 개념정리가 어느 정도 돼야 어떤 일이든 수월해질 겁니다.”
김 실장은 언뜻 보면 초로의 신사같다. 동안이라 하긴 뭣하지만, 의욕이나 기백만으로는 장년층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경상도 사람이라…” 말하는 이면엔 화끈함과 열정이 숨어있다. 무엇보다 ‘천안’이라는 지역에 애착이 높다. 그래서 그의 말 속엔 항상 ‘천안정신’이나 ‘시대정신’이 앞장선다. ‘지역사람 지역으로 길이 보전하세’ 주의다. 줄기차게 향토사를 공부하고, 운초 김부용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를 찾아 매년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천안향토문화연구회장이기도 한 그는 삼거리 흥타령에 관련한 ‘천안의노래’를 회원과 엮어냈고, 흥타령축제 관련 선양위원이기도 하다.
“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가장 우선할 것이 천안의 정체성이며, 지역에 묻혀있는 향토사를 발굴·정비해야 할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천안시사 편찬도 방대한 작업이라 올해는 무척 바쁠 것 같습니다.”
아직은 원석에 가까운 지역향토사. 이를 갈고 닦아 보석으로 만드는 일이 천안향토문화연구회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김성열 연구실장은 그 중심에서 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