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과 죽음은 모두에게 정해진 이치. 잘나거나 못나거나를 따지지도 않고, 부자이든 가난뱅이든 가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똑같이 주어진 삶 속에서 어떤 이들은 두 번을 살기도 한다.
혜자(48)씨의 경우가 그렇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결혼까지 했다. ‘호랑이띠 여자는 사납다’는 속설을 비웃듯이 예쁜 딸내미 둘을 낳고 오순도순 살았다. 남편 직장따라 천안에 내려온 건 새천년이 시작되는 즈음. 그때까지만 해도 삶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딸들이 더 이상 엄마 손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자 ‘우울한 사색자’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 외롭다.’
인생에도 권태기가 있을까. 새순이 돋아나는 초봄에도 마음은 늦가을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이 읊은 명대사도 생각났다.
그녀가 존재에 대한 의문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작은 용기’였다. 어릴적 그림 꽤나 그린다는 소문이 났었다. 친구들 부탁에 그림도 참 많이 그려줬다. ‘그래,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커지자 백석동 주민자치센터 ‘그림반’을 찾았다. 남들이 어찌 생각하든 대단한 용기를 낸 것이다.
“3년 전 그림반에 들어온 후 싹 달라지더군요. 내 존재감이 생겼구요, 좋은 친구들도 사귀었어요. 특히 내가 즐겨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무엇보다 기뻤어요.”
혜자씨는 그림속에 몰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가끔씩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 붓이라도 들고 있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싹 사라졌다. 오디오에 대한 취미가 남다른 남편과 서로 곱게 늙어갈 자신이 생긴다. “전에 방송에선가, 어느 노인이 산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더군요.”
10대도 아니고 20대는 더더욱 아니니, 그리 멀리 내다볼 필요는 없다. 오늘 하루에 성실하고 즐거울 수 있으면 족하다. “올해요? 글쎄…, 나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건강하게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곤, 좀 대답이 평범하다 느꼈던지 “제가 좀 단순해요” 하며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