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시 주최의 학술회의가 지난 8일(목) 단국대 제3과학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단국대 인문과학연구소(소장 마상영)가 맡은 학술회의 주제는 ‘천안 성거산 위례성의 연구현황과 미래’. 백제 첫 도읍지로 알려진 직산 위례성에 대한 학술적 연구와 조명작업의 하나로 시는 이번 세미나와 이들의 연구용역자료를 얻는데 2600여 만원을 들였다.
모처럼 성거 위례성 관련 학술회의가 열렸지만, 지역사회 관심도는 미약하기만 하다. 넓지 않은 방청석은 일부 학생들이 차지했고, 토론 중간에 빠져나가면서 빈자리도 많았다
마상영 소장은 인사말에서 “천안지역의 지리적 중요성과 미래발전가능성을 백제시대의 역사적 중요성을 비춰 재조명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학술회의는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말했다.
이에 성무용 시장은 “삼국유사 등 고문헌에 의거해 천안의 직산이 백제초도라는 점은 천안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반증하는 것으로, 보다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천안시는 올해와 내년까지 위례성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를 추진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며 “일련의 세밀하고 종합적인 학술조사를 통해 백제초도 위례성의 성격을 규명해 천안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천안의 발전적인 미래상을 제시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축사했다.
학술회의는 1부 기조강연, 2부 연구발표, 3부 종합토론으로 진행됐으며 토론자로는 강종원(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백종오(충주대), 최윤희(경희대), 신광철(한신대), 안진수(단국대), 김원필(조선대), 김순영(백석대), 김상엽(단국대), 박성순(단국대) 교수가 참여했다.
체계적인 학술조사 필요해
임효재 서울대 명예교수는 기조강연을 통해 체계적인 학술조사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기조강연은 ‘천안 성거산 위례성의 연구현황과 미래’라는 주제로 임효재 서울대 명예교수(전 한국고고학회장)가 맡았다.
임 교수에 따르면 우선 한국사에 있어서 백제초도지로 한강이북(삼각산 일대, 우이동 일대)과 한강이남(몽촌토성, 풍납토성, 광주 춘궁리, 남한산성 등), 그리고 천안 직산 일대의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위례성’이라는 명칭은 전국 유일하게 천안에 남아있으면서 고지도, 지명, 고문헌, 전설, 고고학 자료에 끊임없이 드러내고 있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여지도(1760년), 청병도(1837년), 조선후기지방지도(1872년) 등에는 지금의 천안 위례산성이 ‘위례성’으로 기록돼 있고, 위례성이란 명칭이 한성기 백제의 도성명을 의미하는 고유명사이므로 적어도 조선전기 이래 지금의 천안 위례산성을 ‘위례성’, 즉 백제의 도읍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향토사학자인 고 김재붕 선생은 ‘근초고왕때까지 백제도읍은 직산이었으며, 371년에 초도지인 직산에서 한강유역으로 이도함으로써 백제가 한강유역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현재 천안 위례성에 대한 견해들을 종합해보면 크게 5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삼국유사와 조선시대 지리서에 의거한 백제초도설, 둘째 목지국 중심지와의 관련성, 셋째 공주 천도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머물렀던 곳, 넷째 아신왕때 고구려 광개토왕에 밀려 일시적으로 이도했을 가능성, 다섯째 고구려 남진을 저지하기에 중요한 위치로 이용되다가 이후 한성인들이 그곳에 정착하면서 왕도명인 위례성을 그대로 칭했을 가능성이다.
임 교수는 “위례성 내부 및 그 주변지리의 체계적인 학술조사가 필요하다”며 활용방안으로 ‘유적복원-체험관조성-프로그램 개발-공원조성’을 제기했다.
‘아산 미추홀설’도 재조명해야
김성호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천안 위례성과 백제 건국’이란 발표를 통해 위례성설의 의의를 짚었다.
온조의 최초 도읍지, 천안의 직산 위례성설이 역사적으로 재조명되려면 첫째 아산의 ‘해빈 미추홀설’과 광주·용인의 ‘한산 부아악설’이 함께 재조명돼야 한다는 것. 그래야 직산 위례성설의 확고부동한 지위가 올바로 재편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둘째로, 공주시와 협의해 웅진도읍 이전 것으로 확인되는 분명한 유물·유적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아산 인주면 미추홀설과 천안 위례성설이 확정되는 최대의 관건이다.
부분조사보단 전면조사로
서정석 공주대 교수는 ‘천안 위례산성의 조사 성과와 과제’에 대해 발표했다.
서 교수는 직산 위례성을 백제초도로 보는 입장에 대해 ‘한강유역이라고 믿고 있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위례산성이 백제시대에 축성되었을 가능성은 확인했지만 초기 도읍지로 볼 만한 근거는 찾지 못했다.
삼국유사에서는 직산지역에 백제 초기 도읍지인 위례성이 위치한다고 했지만, 이보다 먼저 편찬된 삼국사기에서는 위례성을 이름만 있고 어딘지 알 수 없는 ‘유명미상지분’에 포함시키고 있다. 즉 삼국사기가 편찬될 당시(1145년)에는 위례성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는 뜻이다. 또한 삼국유사보다 이른 시기에 편찬된 ‘해동고승전(1215년)’에는 백제가 처음 개국한 한산을 광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이미 고려시대에도 그 위치를 알 수 없다거나 경기도 광주, 혹은 천안 직산으로 보는 등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뚜렷한 정설이 없었다.
위례산성은 해발 525.9m의 위례산 정상부를 남쪽 끝으로 하여 그 북쪽으로 이어지고 있는 해발 500~520m 사이의 능선을 따라 테뫼식으로 축조한 산성이다. 산성의 평면형태는 불규칙한 형태이며, 남북으로 약간 긴 마름모꼴처럼 보이기도 한다.
위례산성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989년이었다. 1주일간의 간단한 시굴조사를 통해 토석혼축성임이 확인됐고, 아울러 축조시기가 백제시대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있음이 확인됐다. 뒤이어 1995년 5월에서 8월에 걸쳐 시굴조사가 이뤄졌고, 96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는 발굴조사가 추진됐다. 이를 통해 성벽의 축성법과 함께 산성의 정상부에서 제사를 지내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구와 토제마, 철제마 등 관련 유물이 발견됐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시·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천안 위례산성이 백제 초기의 도읍지였던 위례성일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삼국사기 기록과 잘 들어맞지 않은 점과, 백제초기로 인정할 만한 유물·유적이 확인되지 않는 점은 부담이다.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은 4세기 이상을 소급할 수 있는 유물이 전혀 없다. 4세기 이후에나 축조한 산성이라는 의미다. 500m가 넘는 험한 산봉에 초기 도읍지가 자리잡는 경우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천안 위례산성이 백제 위례성으로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는지, 또한 조선시대에 폭넓게 받아들여졌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부분적인 조사보다는 전면조사를 통해 위례산성의 구조와 축조방법을 살펴보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위례성 주변활성화 ‘축제전략으로’
조상우 단국대 교수는 ‘천안 위례성 설화의 유형과 그 의미’에 대해, 유동환 호서대 교수는 ‘역사문화자원으로서 위례성의 문화콘텐츠화 방안 연구’란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
조 교수는 위례산성 설화를 크게 위례산 용샘 이야기, 소정방 관련 이야기, 남매 이야기로 보았다. 이같은 설화는 백제의 멸망과 회한이 민중의 삶에 녹아있고 이 땅에 살면서 백제의 멸망, 신라의 통일과 후백제, 그리고 고려의 중흥을 맞이했던 민중들의 바램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조 교수는 “아직까지 하게에 천안의 설화는 보고가 덜 된 편으로, 이번 학술회의를 계기로 천안의 역사와 민속이 더 연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위례성의 문화콘텐츠 활용방안에 대해 유 교수는 ‘역사 속의 위례성과 설화 속의 위례성이라는 두 층의 공간과 그 안에 담겨진 가능성을 발굴해 이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콘텐츠를 창조하는 일은 매우 지난하고도 기나긴 과정을 거쳐야 할 작업’이라고 밝혔다.
그는 위례성을 콘텐츠화 하는 것과 관련해 먼저 기존 발굴자료와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들 유적·유물들의 조각을 맞춰 나타나는 문화유산의 원형을 찾아내는 디지털 복원작업을 진행한 후 위례성 주변을 역사관광의 명소로 만드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위례성 유적지와 주변을 활성화하는 전략으로는 위례성의 전통민속 제의인 동신제를 바탕으로 축제화하는 전략과, 위례성 이야기를 공연으로 만들어 명품공연을 통해 역사문화를 알려나가는 전략을 예로 들었다.
<김학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