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수) 천안박물관 역사문화대학이 제5강의를 열었다. 김경수 청운대 교수가 ‘조선시대의 천안’이란 제목으로 2시간 강의를 진행했다. 김 교수는 천안의 연혁과 지리적 특성을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조선시대에 지방제도와 천안의 사회적 배경에 초점을 맞췄다. 또한 충남지방의 서원과 사우의 제향인물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왕건의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천안도독부가 설치된 것은 지정학적·군사적으로 천안이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말해준다. 술사 예방도 “이 땅에서 군사훈련을 한다면 백제는 싸우지 않고 항복해 올 것”이라며 천안지역의 중요성을 밝혔다. 후삼국통일의 전진기지로 설치되었던 천안도독부(930년)는 이후 성종때 환주로 개명되고, 현종때는 천안부, 충선왕(1310년)때는 전국의 부와 목이 폐지되면서 영주로 개칭되었다가 공민왕때 천안으로 환원되었다.
조선왕조는 지방통치를 위해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군현제를 실시했다. 한 도의 모든 행정책임을 부여받은 관찰사는 중앙과 지방의 행정조직 사이에서 왕권의 대행자로 행세하며 관할구역 내의 정사를 총괄했다.
조선시대 충청도 지역은 대체로 54개 고을로 되어있었으며, 천안은 3개 군현(천안·목천·직산)을 이루고 있었다. 천안이 현재처럼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이기 전에는 군수가 파견되었던 천안과 현감이 파견된 목천·직산으로 나뉘어 각각 발전했던 것이다.
생원·진사는 조선 양반사회 근간이었다. 이들은 양반사회 내에서 일정한 지위를 확보하며 향촌사회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조선 초기 충청도는 서울과 경상도를 제외하고 사마시 입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했다. 천안은 충남의 14개 지역중 공주, 논산, 홍성, 예산, 아산에 이어 6번째로 높은 배출자를 보여주고 있다. 천안의 사마시 합격자 대부분이 유학(학교에 적을 둔 사람)출신이었던 사실과 연관시켜 볼 때 대부분이 양반가문 출신이었다는 점도 알려준다.
천안은 충남의 다른 지역에 비해 서원과 사우가 적었다. 천안지역에 설립된 서원·사우를 보면 충효사(광덕 매당리), 도동서원(병천 병천리), 육현사(풍세 풍서리), 양현사(풍세 삼태리) 4곳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