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진(59)씨는 현재 부영초등학교 교장이다. 73년 천안에서 첫 교사생활을 시작했으니 햇수로 35년 여, 미술교육을 전공한 교직자다. 하지만 정년퇴임을 3년 앞둔 그에게 교직자보다 ‘화가’로서의 영예가 더욱 솔깃하다. 그림수준이 경지를 넘어섰고, 스스로도 그림작업이 그의 생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의 화실은 부영초에서 관사로 내준 인접 부영아파트에 자리하고 있다. 혼자만의 작업에 몇시간씩 열중하다 보면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다.
은사 조영동(전 성신여대교수) 화백은 제자 김관진을 이렇게 말한다. “그는 달관한 경지를 넘어선 작가다. 자연의 진면모를 예리하게 파고들어 마치 그 진수를 뿌리채 뽑겠다는 강한 집착력이 마치 채광자처럼 집요하다.” 그것이 충실하고 편협됨 없이 살아온 그의 성격이 작품에도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칭찬한다. 그리고 제자를 아끼는 마음에서 “이제 자연의 깊은 심연에서 그림을 가슴으로 달구어 풀어나갈 때도 되었다”고 살짝 조언도 잊지 않는다.
교장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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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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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27일(수)부터 6월2일(화)까지 서울 관훈동 ‘갤러리 수’에서 전시회를 갖는다. 서울에서 전시회를 연다는 것은 ‘기천만원’의 비용부담을 어깨에 짊어매겠다는 의지로부터 출발한다. 비용도 문제거니와, 정작 자격요건에 대한 부담이 더 크다. ‘최고들이 모이는 곳에서 어떤 평가가 내려질까’는 큰 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마음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그건 김 화백만의 기우일 뿐이다. 지인들은 ‘충분히 통할 수 있는 작품’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은 작업량에 비례한다’며 6개월 전부터는 학교근무가 끝나는 5부터 줄창 혼자만의 화실에서 자정까지 맹작업을 해온 그. 2004년 첫 전시회를 가졌지만 2008년 두 번째, 그리고 올해 세 번째 개인전을 열 만큼 물오른 작품활동에 여념이 없다.
그의 높은 작업열의는 감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중학교까지 산 고향은 보령에서도 오서산이자리한 깊은 산골시골이었죠. 그러다 보니 어릴적 향수가 깊게 배여있어요. 어떤 풍경을 보더라도 고향마을이 생각나고, 그곳 산자락이 생각나죠.” 그것을 동력원 삼아 그림으로 표출한다. 그의 작품이 대부분 풍경화에 머무는 것은 이런 이유이기도 하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내 생활의 일부이며 삶에 향기를 불어주는 수단입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올망졸망한 산이었고, 넓지 않은 논과 비탈진 언덕밭, 구불구불한 논밭길, 맑은 실개천이 흐르는 산골입니다.”
풍경화는 화가들이 즐겨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흔하다 보니 수강생들이 입문과정에서 주로 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풍경화라도 질적수준이 똑같을까. 적어도 김 화백의 작품은 풍경화를 ‘사실묘사’를 바탕으로만 둔 마음의 풍경을 담는다. 풍경을 재해석하지만 결코 비구상화로 옮겨가지는 않는 그만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그래선지 어떤 강물은 온통 금빛으로만 치장됐고, 어떤 산촌은 붉은 기운이 가득하다. 평범한 산길조차도 그의 작품에서는 자연의 생명력이 흘러넘치지만 결코 과장돼 보이지 않는다. 자연은 자연대로 담되 그같은 풍경을 어떤 마음으로 대면했는지의 느낌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이같이 되기까지 그의 그림사랑은 악착같다. ‘미술’에서만큼은 교장으로서의 체면도 버린지 오래다. 초등학교는 선생들이 별도 전공을 연연하지 않고 가르치기에 간혹 ‘미술전공교사’가 없을 때도 없는데, 그런 때는 김 화백이 오히려 바라는 바. 미술대회가 있거나 미술과 연관된 일이 생길때면 미술코치를 도맡는다.
“미술대회가 있거나 하면 참가아이들을 교장실로 불러 틈틈히 가르치죠. 전공선생이 있어도 어느때 바쁘면 내가 나섭니다. 그런 나를 아이들은 ‘화가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좋아해요.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나도 더욱 열심을 내서 배우게 되더라구요. 내가 있는 학교는 공개수업 등 미술 관련 교육이 은근히 많았던 것 같아요. 하하”
말수도 적은 선비차림의 김 화백이지만 미술사랑에 천안미술협회 부지부장과 감사, 충남초등미술교과연구회장 등의 대외적 활동에도 적극 나섰고, 현재도 그릴회, 시형회 등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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