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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남‧서부의 잃어버린 옛 지명 ‘대천(大川)’을 찾아서

백승명(직산위례문화연구소장 , 해동금석문역사지리연구원장)

등록일 2009년03월05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천안과 그 주변지역 및 전국의 지방을 답사 하면서 늘 상 느껴오던 것 중에 하나가 언제부터인가 우리민족의 선현(先賢)들이 남겨준 아름다운 옛 지명(地名)들은 우리 곁에서 하나 둘씩 또 무수히 사라져 가고 있음을 살펴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잊어버리기도 하고 또는 우리 스스로가 왜곡을 하기도 하며 혹은 이민족의 침략에 의해서도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 사실을 옛 역사사료와 근‧현대의 자료를 통하여서도 그 현상을 살펴 볼 수 가 있었기 때문 이었다.

이번호에는 천안남서부지역의 많고 많은 옛 지명중에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버린 옛 지명 ‘대천(大川: 이하 대천)’ 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 제시한 대천의 지명에 대하여 현존하는 사료와 자료 및 구전(口傳) 등을 통하여 그 역사적 위상과 옛 위치는 지금의 어디에 해당하고 언제부터 사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사료와 자료를 검토하여 살펴보고 이에 대한 제언(提言)을 하고자 한다.

풍세 남관리 다리에서 바라본 옛 대천의 현재모습. 좌측은 차령고개 일대와연기군 전의 일대에서 내려오는 물이고 우측은 광덕과 풍세 일원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다. 먼저 천안남서부의 옛 지명 대천에 대한 최초의 출전(出典)이라는《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하 여지승람)》의「권(卷), 15」,『천안군(天安郡)』,「산천(山川)」,조(條)에 그 위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시를 하고 있다.

- 大川, 在豊歲縣北, 距郡九里(번역문: 대천은 풍세현 북쪽에 있는데 〈천안〉고을에서 〈남쪽으로〉9리 떨어져 있다.) -라고 적시함으로써 옛 지명 대천이 있었던 위치를 파악 할 수 있게 되었다. 앞에 적시된 ‘9리(里)’ 를 당시의 도량형으로 거리를 환산 하면 대략 4km 정도가 된다.

조선시대 당시 천안군의 관아(官衙)는 지금의 천안시 동남구 오룡동의 천안중앙초등학교일대에 있었으므로 이곳으로부터 남쪽으로 대략 4km 정도를 가게 되면 옛 지명 대천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위 앞의 대천은 앞의 중앙초교에서 남쪽으로 대략 4km 정도를 가게 되면 그곳은 지금의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남관리 앞에 흐르는 현재의 속칭 ‘풍서천(豊西川, 일명 풍세천 혹은 풍세냇갈, 혹은 광덕천,)’ 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앞의 대천은 천안지역에서 발행한 기존의 향토지【鄕土誌: 단 졸저(拙著) ,역주신증동국여지승람 -전의현, 천안군, 편, 제외】에는 물론이거니와 현재의 속칭 ‘풍세냇갈’ 일대의 입간판과 안내문 어디에도 그러한 역사적 사실이나 기록을 한 것 등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점 등을 감안 할 때 대천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무엇 이였는지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위의 대천에 관한 사료와 자료를 살펴보면 속칭 ‘일제강점기’ 이후에 역사기록의 표면에서 아예 사라져 버렸음을 살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1890년대 후반까지의 천안관련의 각종 옛 읍지(邑誌)와 지지사서류(地誌史書類)종류의 서책 등에는 대천이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반면 속칭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대천이라는 기록은 공식적인 기록 등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렵고 대천 대신에 속칭 ‘풍서천【豊西川, 일명 풍세천 혹은 풍세냇갈, 혹은 광덕천 혹은 천안천】’ 등의 지명 명칭이 대두되고 있다.

이상의 개략적인 내용과 관련 자료 등을 검토하여 볼 때 일제(日帝)는 속칭 ‘식민지 말살정책(植民地 抹殺政策)’의 일환으로 여러 가지 말살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말살정책 중에는 속칭 ‘하천 정비 법(河川整備法)’이라는 미명【美名:하천의 명칭에 대한 혼란방지와 하천명칭의 통일성 유도… 운운】의 정책 하에 일제는 우리하천의 고유한 명칭에 대하여 교묘히 지명말살정책을 시행 하였던 것이다.

그 후 8 ‧〮〮 15광복 이후에 우리정부는 하천명칭 등에 관한 정책 등을 추진하면서 일제가 시행했던 지명말살정책 등을 일부 답습한 정책과 지명위원회 및 천안지역의 향토인(鄕土人) 등에 의한 와전(訛傳)과 왜곡 및 곡필(曲筆)등에 의하여 대천이 역사무대에서 사라져 버렸음을 살펴 볼 수가 있었다.

옛 천안의 대천과 옛 천안의 봉호천이 온양의 포천에 합수되는 현재의 곡교천 모습. 남동쪽의 좌측은 천안시내의 중심지 일대에서 내려오는 현재의 천안천(옛 봉호천) 냇물이고 사진 우측은 광덕과 풍세 일원에서 내려오는 옛 대천(현 풍서천)의 물줄기다. 이 옛 지명 대천은 그 역사적 가치나 위상이 대단한 지명 이였음을《삼국사기》와 앞의《여지승람》및《영성지(寧城誌: 천안지역의 옛 역사를 기록한 읍지(邑誌)책자》등의 사료를 통하여 그 역사적 가치와 위상이 충분히 확인된다.

먼저 앞의 풍세 , 광덕면 일대에는《삼국사기》,『지리지(地理志)』에「감매현(甘買縣)」이 있었다고 전하며《여지승람》과《영성지》또한 백제시대의 옛「감매현(甘買縣)」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매현(甘買縣)」의 ‘감’ 이라는 음(音)은 고대(古代)와 중세(中世)의 언어음(言語音)인 ‘검’, ‘금’, ‘곰’, ‘고마’ 등의 음가(音價)와 서로 모두가 앞뒤의 자의(字意)글자 뜻에 따라 일부 통용되던 소리글자이었음을 현재 남아있는 각종의 사료와 자료에 나타나고 있다.

일례로 공주의 옛 지명을 ‘구마나리, 혹은 구마나루, 혹은 고마나루, 혹은 나루’ 등을 ‘나루’ 또는 ‘진(熊津)’ 또는 ‘강(錦江)’ 또는 ‘진(大津)’ 이라고 표현한 사례 등에서 그 사실을 뒷받침 하고 있다.

이때의 ‘검’, ‘금’, ‘곰’, ‘구마’ 등의 음가는 고대와 중세의 음가에서 앞뒤의 문자(文字)에 따라 ‘신(神)’, ‘크다〔大〕’, ‘높다〔高〕’, ‘많다〔豊, 多〕’ 등의 뜻으로 쓰여 졌음도 앞의《삼국사기》와《여지승람》등의 사료 등을 통하여 확인이 된다.

아울러「감현(甘買縣)」의 ‘매(買)’ 라는 음(音)은 고대와 중세의 언어음에서 ‘물〔水〕’, ‘내〔川〕’, 등의 뜻으로도 쓰였음을 볼 수 있다.

일례로 앞의《삼국사기》와《여지승람》등의 사료에 경기도 수원(水原)의 옛 지명인「홀(買忽)」,「성(買城)」중,‘매(買=물=水)’로 인식되어원(水原)」,「성(水城)」으로, 지명이 바뀐 사례 등을 통하여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 하고 있다.

즉,「감매현(甘買縣)」의 ‘감(甘=한=대=大)’ 이라는 음가(音價)와 ‘매(買=내=川)’라는 음가는 ‘감매=대천이라고 하는 음(音)과 훈(訓:세김)의 변화된 내용을 통해 ‘대천’과 ‘감매가 서로 상통(相通)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또한 천안의 풍세와 광덕 일원의 속칭 ‘풍서천(豊西川)’ 을 지역노인 분들과 주민들의 구전(口傳)에는 ‘곰내’ 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음이 확인 되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서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 등과 일부 부합함을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풍서천(豊西川)⇎감매=대천이라는 내용은 도무지 그 어원적 뒷받침이나 사료나 자료 및 구전 등에서 그러한 전례 등이 보이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의 사료와 자료 및 구전 등을 정리해보면 대천은 일제강점기와 지명위원 및 천안을 연구하던 향토연구자 등에 의하여 곡필되고 왜곡되어 와전 되어 버렸다.

따라서 앞의 내용을 종합하여 천안시와 관계기관에 제언 하건데 왜곡된 천안 남서부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옛 지명 ‘대천(大川)’ 이 완전히 잊혀 지기 전에 현재의 속칭 ‘풍서천(豊西川)’의 표기나 안내문 등에 이러한 역사적 사실 등을 병기(倂記) 하거나 기록보존을 하여 후세에까지 올바른 역사적 사실이 전달 될 수 있도록 기록에 대한 정리를 하여 주기를 제언(提言)하는 바이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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