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천안지역의 향토문화가 지역 향토사가들에 의해 상당부분 왜곡돼있다고 판단, 백승명 직산위례문화연구소장과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지역사회 역사관을 바로세우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글/ 백승명 직산위례문화연구소장, 사진․정리/ 김학수 기자>
천안 광덕사 앞의 400년 된 호두나무(천연기념물 제398호)는 고려 충렬왕때 유청신(柳淸臣)이 심었다고 잘못 전해지는 바, 그 연대나 시대적으로 현존하는 역사적 기록과 그 과학적 사실이 맞지 않는다.
오는 정월 보름(2월9일)에는 각종 부스럼을 막기 위해 부럼을 먹는다. 부럼의 종류에 호도(胡桃, 혹은 호두: 여기서는 ‘호도’로 통일함)가 있는데 이 호도는 현재 충북의 영동군 지역을 비롯해 천안지역 등지에서 주로 생산되고 있다.
이중에서 천안지역이 ‘호도과자(혹은 호두과자)’라는 상품의 명칭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는 사항은 이미 일제강점기 이후 세간에 널리 알려져서 이후에 이 ‘호도과자’를 판매 하는 업소 또한 계속적으로 증가 추세에 있다.
그런데 이 ‘호도과자’ 라는 상품의 명성을 등에 업고 최근의 몇 십 년 전부터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호도의 시배지【(始培地:처음으로 심고 가꾸어서 재배하는 것)】는 천안이다. ...’ 라고 ‘...운운’하는 식의 허구는 ‘제씨(諸氏:여러 사람)’에 의해 또다시 잘못 유포된 채로 세상에 잘못 회자되고 있어서 역사의 왜곡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런데도 각종 신문의 보도내용과 인터넷자료 및 각종백과사전과 천안시청의 인터넷홈페이지 등 ‘난맥(亂脈)상’으로 널려있는 이같은 내용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국민과 외국인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이에 올바른 역사적 사실을 다시 전달하고 그 잘못된 내막을 베껴내 올바른 역사의 진실을 밝혀보고자 한다.
앞의 예시, <전략(前略)...호도(胡桃)는 고려 충렬왕때(1290년 무렵)에 천안 출신의 유청신(柳淸臣)이 중국의 원(元)나라에서 가져와 천안의 광덕사(廣德寺)와 자신의 집인 광덕면 매당리(梅堂里)에 심은 것이 우리나라 호도역사의 시작이며...천안이 호도의 시배지(始培地)이다.>라는 식의 ‘핵심 인용문’ 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와전와(以訛傳訛)식 전달의 ‘오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유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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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도비와 관련한 각종 안내판에는 유청신이 전래해 시초가 됐다는 잘못된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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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서지학적인 면), 현존하는《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고려 충렬왕(忠烈王)~충선왕(忠宣王)때의 유청신(柳淸臣)은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지역 출신의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려사》의『열전(列傳)』 「간신(姦臣)」편에 수록된 고려 충렬왕(忠烈王)때의 유청신은 천안지역 출신의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高興)지역에 있었던 옛『...高伊部曲人也...(고이부곡 사람이었다)』라고 전한다.
더욱이 앞의《고려사》내용에 의하면 ‘유청신은 고려를 배반하고 원(元)나라의 심왕(瀋王)인 고(暠)를 고려왕으로 옹립하려는 반란을 책동하다가 그 책동이 실패로 끝나서 두려운 나머지 고려에 귀국도 하지 못하고 그곳 원나라에서 머물다가 사망했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항간에 잘못 회자되고 있는 ‘유청신은 천안지역 출신의 사람...운운’의 내용은 그 최초의 출전(出典)이라고 전하는 앞의 《고려사》의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유청신은 천안사람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곳 원나라에서 사망했음도 알 수가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및 《영성지(영성지: 옛 천안군 지역의 읍지)》 등의 서지학적인 전거의 기록내용 등에 수록된 전국의 「토산물(土産物)」편(篇)에 수록된 토산물 중에도 천안은 아예 호도자체가 기록되어 있지도 않았다.
앞의 전거에 의하면 지금의 충북 영동군 일대가 지방의 토산물 중에 호도의 재배에 대한 북방의 한계선이었음을 알 수가 있으며 천안지역은 그 당시(1450년대 전후)의 기록에서도 아예 보이지 않으며 기록조차 없었음을 알 수가 있다.
옛적에 국가에 지금의 지방세 세금의 일환으로 납부되었던 토산물을 국가(앞의 세종실록과 여지승람)나 지방(앞의 영성지)의 공식적인 종합문서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 등으로 검토하여 보면 그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음을 앞의 각종 사료와 후대의 자료 등을 통하여 충분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현재 또한 충북 영동군 일대가 호도의 재배에 관한 한 천안지역보다도 독보적으로 앞서있음을 각종의 사료와 자료를 통하여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둘째(식물 과학적인 면), ‘천안 광덕사 앞의 400년 된 천연기념물 제398호의 호두나무는 고려 충렬왕(忠烈王)때에 유청신(柳淸臣)이 심었다.’ 라고 전하는 잘못된 와전(訛傳)은 그 연대나 시대적으로 현존하는 역사적 기록과 그 과학적 사실이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청신이 서기 1290년에 가져왔다는 호두나무묘목’과 현재 광덕사 앞의 천연기념물 제398호로 지정된 호두나무와는 그 연대가 유청신과는 시대적으로, 또한 연대적으로도 전혀 맞지 않다.
그 호도나무의 나이라는 수령을 문화재청에서 실험 조사한 1990년대 기준으로 해보더라도 시간과 연대가 거의 300년의 편차가 있으니 그 나무를 유청신이 심었다는 내용 등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셋째(역사고고학적인 면), 그뿐만이 아니라 전라남도 광주광역시의 신창동 백제고분군 유적과 저습지 유적을 발굴한 국립 광주박물관에서 간행한 『신창동 백제고분군(저습지) 유적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백제의 고분군(古墳群)에서 호도가 나왔다. 여러 알의 호도는 육안으로도 식별이 가능하고 방사성연대측정의 과학적인 실험에서도 약 2000년 전의 것으로 확인됐다. 국립광주박물관의 발굴과 그곳 유적에 대한 실험결과보고서인 앞의 유적보고서에서도 그 내용이 과학적으로도 충분히 확인돼 학계와 관련 기관 및 세계에 정식 보고됐다.
앞의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호도가 천안의 광덕사 호두나무보다도 무려 1600년 이상 앞서 있으며 고려 충렬왕 때의 간신으로 기록된 유청신의 생존시기보다도 무려 1200년 이상을 앞서 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앞의 내용과 관련된 천안시와 광덕사 및 관련 단체 등에 제언(提言)하건데 앞의 잘못 와전된 ‘천안은 호도의 시배지... 운운’ 하는 ‘엉터리 내용’ 등을 세긴 광덕사 앞의 안내문 간판과 비석 등을 깨끗이 일괄정리하길 바란다.
아울러 새로운 사실에 입각해서 올바른 내용의 역사적 사실을 관련전문가와 협의하고 또 제대로 고증해 다시 세워서 후손들에게 엉터리 역사를 물려주지 않기 위함과, 조소(嘲笑)를 면키 위해서라도 또 아울러서 일반대중에게 올바른 역사적 사실을 다시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광덕사의 앞에 있는 안내문과 표석 및 비석 등과 천안시의 인터넷 자료 등을 새로이 정립할 것 등을 재차 제언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