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사 한영숙 춤 심포지엄’이 13일(토) 오후 3시 천안박물관 공연장에서 열렸다. 벽사 한영숙(1920년~1990년)은 천안예총의 2008년 지역예술인선양사업에 선정된 인물이다.
그가 천안에서 보낸 것은 5년간의 유년생활 뿐이다. 춤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13살때였으니, 천안에서 자란 기간은 춤과도 무관하다. 천안예총이 그를 천안의 대표적 예술인으로 선정한 것은 오로지 ‘천안 태생’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5살 때까지 외가인 천안에서 자라다 충남 홍성의 갈미보통학교를 다녔다. 1930년 11세 되던 해 민속춤의 대가, 조부 한성준이 서울로 데려가면서 비로소 춤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승무·검무·살풀이춤·바라춤·태평무 한량춤·학춤을 배웠고 양금과 해금을 익혔다. 1946년 한영숙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했고 한국국악예술학교 등에서 후학을 지도했다. 국가사절단으로도 활동했고,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대회 폐막식 공연에서 살풀이춤의 진수를 세계에 알렸다.
전통무용연구 정립해야
벽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와 제40호 학무 기·예능보유자다. 승무는 한성준에 의해 체계적인 예술작품으로 무대에 올라섰지만, 이를 전승시켜 온 것은 손녀, 벽사다. 1969년 처음 중요무형문화재로 벽사가 지정된 후 1987년 이매방, 1996년 이애주, 2000년 정재만으로 이어지고 있다.
주제발표에서 배성한 숙명여대 교수는 “한국춤에는 여러 미적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으며, 그중 가장 절제된 미를 간직한 춤이 승무”로 꼽았다. 특히 벽사의 춤은 군더더기 동작이 없다. 우아하고 담백한 데다 귀족적이고 품격높은 멋이 있다. 배 교수는 “하지만 우리 민속무용이 외면받는 현실에서 전통춤인 승무에 가장 기본적인 맛과 멋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재정립하는 것이 진정한 춤꾼들의 몫”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황경숙 남서울대 교수는 “벽사의 탄탄한 전통춤의 뿌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규정지을 수 있는 척도가 된다”며 그를 빼고 전통춤을 얘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벽사의 춤에는 ‘보편적 중심성’이 있다. 1969년 춤 종목으로 유일하게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그의 ‘승무’다. 벽사 춤의 보편적 가치성, 즉 한영숙류의 춤이 세간에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있음을 반증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이수자인 정용진씨는 “특히 한영숙 선생의 삶이자 인생의 현신은 살풀이춤”이라고 밝혔다. 승무를 출 때는 처절한 구도자로, 학무를 출 때는 한 마리 학이, 태평무를 출 때는 화려한 왕비가 됐지만 살풀이를 출 때는 모든 기량과 정신을 하나로 융합하고 초월해서 그녀의 인생을 그대로 나타냈다고 회상했다. 이는 벽사가 생전에 “살풀이를 출 때가 제일 편하다”고 한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황 교수는 “한영숙의 예술혼을 재조명해 다각적인 전통무용연구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학수 기자>
2009 문화예술선양사업 선정
김화경, 그는 누구인가
천안예총이 2009년 문화예술선양사업에 ‘김화경 화백’을 선정했다. 2005년부터 시작한 천안 문화예술선양사업은 첫해에 ‘민촌 이기영(소설가)’을 선정했고 2006년엔 ‘이돌천(풍물굿)’, 2008년에 ‘한영숙(무용가)’을
김화경(1922년~1979년) 화백의 호는 유천, 태어난 곳은 충청남도 아산이다. 이당 김은호에게 채색 인물화를 배워 화단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42년 일본에 가서 동경의 제국미술학교 사범과를 1944년에 졸업했다.
김화경은 광복 이후부터 1960년까지 천안 등지에서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참가했다. 그 뒤 서울로 올라가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중견 한국화가단체인 백양회 동인전에 참가했다.
초기작품에는 일본화의 영향이 짙은 채색인물화를 그렸으나 1960년 무렵부터는 한촌의 초가집 풍정 등 향토적인 소재를 독특한 수묵필치와 채색기법으로 표출했다. 대표작에 ‘해와 초가’,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등이 있다.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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