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동옷으로 갈아입은 가을녘. 성남면 대정리로 접어드는 길목은 온통 단풍으로 화려하다. 산자락으로 둘러쌓여 그늘이 배어문 길을 한참 오르니 한자락 햇볕이 드는 곳에 ‘유원농장’이라는 푯말이 보인다.
사립문에 서니 비닐하우스 안에서 분주하게 오가는 형체가 눈에 띈다. 전에 천안산림조합장으로 있던 류재욱(78) 대표다. 희수(喜壽)를 넘겼음에도 정정하기는 30대 못지 않다.
반갑게 맞이하는 중에도 손놀림은 여전히 바쁘다. “이놈들 월동준비하느라….”
말이 ‘이놈들’이지 유원농장엔 식물이 4000점이 넘는다. 그것도 희귀한 변종들로, 하나 하나 이름을 품고있는 것이 자식보다 더하다. 당연히 각종 방송사나 잡지사 등에서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인지 ‘전국에 유원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도 듣는다.
“요놈이 동백꽃 사촌 산더화야. 요건 거제시청에 모화가 있는 오백화동백이고, 요게 동백과 산더화의 교배종으로 꽃이 크지.” 겨울을 앞두고 있어 대부분 몸을 웅크리고 있지만, 동백만은 아직도 한철인지 때깔이 싱그럽고 곱다.
옛날 임금만 따먹었다는 ‘토종능금(자문박능금)’이 조막만한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붉은꽃차나무를 비롯해 한포기에 100만원을 웃도는 남아공 만첩골고사리도 보인다. ‘천사의나팔꽃’의 무늬종을 갖고 있는데 아직 학계에 발표자가 없다고 자랑이다.
겨울들어 16도 이상 유지해줘야 산다는 류 대표는 대화중에도 연신 물을 뿌리고 화분을 나르고, 낮동안 걷어두느라 쳐올렸던 비닐을 풀었다. 웬만한 정성이 아닐 수 없다.
여생 ‘나팔꽃 연구와 도감작업’으로
"진귀한 나팔꽃이 있다 들었는데….”
굳이 기자가 찾아간 용건이 나팔꽃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천안지역의 자랑거리인 ‘유원농장’과 이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류 대표의 안부도 겸했다. 정작 속내는 4000여 점의 변종식물을 보고자 함인지도 모르겠다.
“있지. 나팔꽃은 최근 몇 년동안 내 위안거리야.”
예부터 한국 전역에 자생한 메꽃과 식물인 나팔꽃을 류 대표가 즐겨기르는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잊지 못할 추억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설 일본인 교장선생이 교무실 앞에 여러 꽃을 재배했는데 아침 일찍 등교하면 언제고 반겨주는게 나팔꽃이었지. 그런데 몇시간도 안돼 시들어버려 안타까움을 줬지만 다음날 아침 한걸음에 달려와보면 또다시 피어있길 7월부터 10월까지…, 이젠 아련하지만 참 행복한 추억이지.”
몇 년 전 우연한 기회로 일본종자 20여 알을 구해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년간의 노력 끝에 아름다운 변종꽃을 얻을 수 있었다. “미인박명이란 이 나팔꽃을 두고 하는 것 같아. 20여 가지 꽃들을 감상하고 있지만 오전 5시에서 10까지가 이들이 깨어있는 시간이지.”
어렸을 때도, 지금도 줄곳 아쉬운 나팔꽃의 짧은 하루. 한나절 피어있는 나팔꽃을 만드는데 여생을 바치고 싶다는 욕심을 부려본다.
한나절 나팔꽃이 사적욕심이라면 진짜욕심은 자신이 재배한 식물군들의 도감을 만드는데 있다. 애지중지 수십년 키워온 식물들이 값없이 사라지는 걸 원치 않기에 그의 도감작업은 고단한 몸을 추스르는 것보다 앞선다. “도감을 만들면 얘네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거야. 도감 속에서 살기 때문이지. 또한 마니아에게도 귀한 자료가 될 수 있어 좋지. 계속 작업중이니 언젠간 이룰테지.”
뚜렷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늘은 열정을 주시는가. 젊은이도 들지 못할 덩치 큰 화분을 가뿐히 든 모습이 무척 행복스럽다.
감과 커피를 내놓는다. 집 주변의 100년된 감나무에서 딴 거란다. 꼭지만 따고 성큼성큼 먹었다. 자연을 먹는 기분. 류 대표의 도감은 언제 나올까. 또한 한나절 피어있는 나팔꽃도 볼 수 있을까.
<김학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