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 좀 썰어주세요.”
“예. 잠깐만 기다리세요.”
유량동 한 음식점. 마당엔 감나무 잎이 떨어져 가을운치가 가득하다.
“지금은 고기나 썰고 있지만 한때 열정으로 팔딱거릴 때가 있었죠.”
그저 잘나가는 고기집 사장으로만 알고 있던 홍길동씨는 10년 전만 해도 판이한 삶을 살았다.
“서울 신촌주변에서 동가식서가숙하며 대학시절을 보냈는데, 그때 참 많은 사람을 만났고 사귀었죠. 서천촌놈의 사고가 당시 확 틔워진 것 같아요.”
이데올로기적 사고가 지배하던 시절, 미술을 공부하던 그에게도 ‘민중계몽’이란 화두가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순수문화예술이 대중과 소통해 삶의 질을 확대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고.
그러다 강사 구할 때까지 3일간만 도와달라는 ‘홍익미술학원’ 원장의 부탁으로 “그러마” 하고 학원차량을 탄 것이 천안과의 인연으로 연결됐다. 서울 홍익대 어디메쯤으로 생각한 것이 실제는 천안의 한 학원이었던 것. 3일이 한달이 되고 1년이 되면서 눌러앉게 된 그는 아예 미술학원까지 차렸다.
학원이 안정되자 그가 고민하던 ‘문화와 대중의 소통’이 다시금 머리에 박혔다. 어느날 ‘영화’가 주는 소통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어릴적 서천 고향에서 극장집 아들로 자랐던 영향이 머리를 채웠다. 무작정 서울의 영화학교를 2년간 다녔다. 당시 임권택 감독 등 강사로 있던 사람들이 현재 영화계의 쟁쟁한 실력자인 것도 정겹다.
“서울서도 망하는 영화산업”이라며 만류하는 사람들 손을 뿌리치고 천안역 인근 건물 2층에 ‘시네마테크’라는 영화연구소를 차렸다. 그로부터 4년간 하루평균 15편씩 명작영화들을 상영했다. “당시가 93년부터 97년까지였을 거다.”
‘페미니즘영화제’를 비롯해 ‘독립영화제’, ‘제3세계영화제’, ‘작가영화제’ 등 닥치는 대로 판을 별렸고, 업계 관계자나 마니아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돈벌이가 되는 것은 아니었죠. 미술학원에서 버는 돈이 영화연구소에 사용되는 것이죠.”
4명의 직원을 둔 영화연구소에 많은 돈이 들어갔지만, 그래도 좋다고 생각한 그의 꿈에 4년간 행복했다. 밥도 굶고, 잠도 못자고 새벽까지 하던 작업이 조금만 맘에 안들어도 재작업을 할 정도로 악착같던 시절. 외국에서 들여온 비디오를 번역하고 자막도 넣으며, 참 말도 안되는 고생을 했다.
지금도 그의 집 한켠에는 600여 비디오가 증인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오늘같이 고기를 썰다가도 예전의 열정이 샘물 솟듯 떠오르기도 한다. “그때가 좋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