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키에 건장한 체구를 가진 성원씨. 노총각이지만 순박한 성품이 늘 근심없는 사람처럼 비쳐진다. 뚝심도 있다. 야우리의 경비·미화원의 터줏대감으로 이직이 높은 자리에서 14년, 어느샌가 37명을 부리는 ‘반장’이 됐다.
그런 그에게 벼슬처럼 따라다니는 자랑거리가 하나 있다. ‘박문수(1691~1756) 어사 9대손’이라는 것. 박 어사는 숙종~영조때의 암행어사로, 영남지역 탐관오리에게는 악귀같은 존재였다. 그분과는 기껏 250년 차. 가끔 시차를 뛰어넘어 마주할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성원씨 부모가 사는 북면 고령박씨 종중재실은 박 어사가 마지막 기거했던 곳. 이 재실은 1832년 건립, 1932년 수축해 본래의 모습은 없으나 박 어사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런 그에게 최근 고령박씨 종중이 ‘유물 500여점’을 천안박물관에 기증한 것은 작은 충격. 연못에 파장이 일듯 성원씨 마음도 뒤흔들렸다.
“유물들은 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늘 함께 한 친구였죠. 사람들이 찾아오면 걸어뒀던 문을 활짝 열고 보여주는 일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시청분들이 찾아와 자물쇠를 열어달라더니, 잠시잠깐 충헌사 유물실에 빼곡했던 유물들이 몽땅 사라지더군요. 내 나이 41년간 봐왔던 유물이었는데….” 성원씨 얼굴에 잠시 슬픈 빛이 감돈다.
친구같은 존재와 생이별했으니 마음이 오죽 하겠는가. 어머니 이종숙(68)씨도 “기증문제로 장남(성원씨)이 가장 마음아플 것”이라며 안타까워한다.
성원씨는 마음만 아파할 겨를도 없다. 슬퍼한다고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아는 까닭이다. 뭔가 늦기전에 시로부터 확답을 받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언젠가 또다른 때가 오면 우리에게 돌아오겠죠. 여건 때문에 기증한 건데, 돌려받진 못하더라도 있을 곳에 가는 것이 제일 좋은 것 아니겠어요.” 그는 어느땐가 관광객의 발걸음이 늘고, 그로인해 고령박씨 종중재실과 유물관이 재정비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면 유물도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나름의 소망을 품기도 한다.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히다 보니 불만도 새어나왔다.
“93년도인가 시가 지어놓은 유물관은 이제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됐습니다. 우리에게도 문제가 없진 않겠지만 부실한 시건장치와 관리계획으로 15년째 방치하다니, 타 지역을 둘러봐도 이렇게까지 하는 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실제 국도변에서 들어오는 팻말 하나 제 역할 하는 것이 없다. 마을 입구에는 500년 된 느티나무가 전통있는 마을 분위기를 잡아주곤 있지만 폐가도 있고, 유물관 바로 옆의 축산농가로 악취와 미관문제가 발생하는 등 다양한 문제거리를 안고 있는 것.
묵묵히 종중재실을 지켜왔던 아버지, 박용희(73)씨는 노환으로 거동을 못하는 상태. 그 때문에 농사일 돌볼 사람도 없이 어머니는 연로하신 아버지 곁에 매여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성원씨다.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푸념처럼 내뱉는 말이지요. 가끔씩 분통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크게 덕보려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9대손까지 유물이 보전돼 내려오듯이, 후손에게 제대로 된 것을 물려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죠. 그리고 훌륭한 선조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 모든 한국민이 흠모의 마음을 갖고 가끔이나마 찾아주길 바라는 정도 말고는….”
<김학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