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주룩주룩 시원한 빗줄기를 뿌리던 23일 오후, 성거산 중턱의 천주교 사제관을 찾았다.
작은 체구의 정지풍(60) 신부가 반가이 맞았다. 성거산 성지에서 생활한 지 어언 13년 여. 산사람이 다 된 듯 다소 까부잡잡한 피부가 눈에 띈다.
천안의 남쪽에 광덕산(699m)이 있다면 동북쪽엔 성거산(579m). 태조 왕건이 ‘신령이 있다’고 지은 이름이기도 하며, 백제초도라 주장하는 위례산성의 여러 흔적들이 곳곳에 묻혀있다.
정 신부의 성거산 사랑은 최근 ‘도문화재’ 지정과 함께 더욱 깊어졌다. 성거산 정상부근의 ‘교우촌’이 200년도 훨씬 넘어 도기념물로 지정받게 된 것이다. 물론 지정받기까지는 정 신부의 다양한 노력들이 있었다.
“단지 사상이 다르다고 107명의 천주교인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적 사랑과 남녀평등을 외쳤을 뿐입니다. 남존여비를 타파하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상이 당시 유교사상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목숨까지 뺏을 권리가 누구에게 있습니까.”
정 신부는 그동안 무명의 순교자들이 사회로부터 소외돼야 했던 것에 섭섭함을 표시했다. 종교라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는가.
“민주주의를 위한 행위가 존중되는 것이라면 민주근간이 되는 남녀평등을 부르짖은 이들 또한 열사로 볼 수 있지 않나요.”
언제부턴가 순교자 무덤에 피어나는 이름없는 들풀을 보면서 ‘순교자의 분신’이 아닐까 생각. 본격적인 토종야생화를 가꾸기 시작했다. 1791년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며 내포지방에서부터 쫓겨쫓겨 성거산 깊은 곳으로 은둔하며 살길 100여 년. 1886년 한불조약에 따라 신앙의 자유화를 보장받기까지 최대 150명이 숨어 살았다.
▶성거산 교우촌이 도기념물로 지정받기까지 노력이 많았다고 들었다
-여러 노력들을 기울였다. 자유와 평등을 바랐을 뿐인데 박해와 죽음에까지 이르렀다. 충분히 역사적 가치가 있다. 지난해 12월 천안시민회관에서 관련 세미나를 가진 것도 문화재 지정을 위한 준비작업이었고, 이전에도 연구자료집을 만들기도 했다.
▶박해의 원인은 무엇인가
-유교와 기독교의 충돌이었지만, 종교 외적으로는 지배계급의 기득권 유지가 아니었을까. 유교의 근간을 통해 나라가 유지돼 왔을 터인데, 당시 천주교인들의 사상은 남존여비를 타파하는 남녀평등을 주장했고, 특히 제사를 지내지 않는 행위는 배척의 중요한 원인이 됐을 거다. 순교자들을 죽인 것은 바로 ‘나라’다.
▶이런 부분에서 열사와는 사회적 시각이 다른데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종교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다 보니 방치돼 왔고, 소외돼 왔다. 민주주의에서 ‘남녀평등’이란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가. 천주교인들이 외친 것은 종교활동의 보장만이 아닌,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 근간이었다.
▶관내 기독교적 문화재로는 성거산 교우촌이 처음인 것 같다
-천안에 62점의 문화재가 존재하지만 성거산 교우촌이 유일한 기독교 문화재다. 불교사상이 우리역사에 뿌리가 깊다 하나 문화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때 이제라도 지정된 게 그나마 다행이다. 기독교사상이 근·현대에 미친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사상의 자유를 비롯해 문화, 서적, 제도 등 다양한 부문에서 발전계기를 이뤄왔다.
▶성거산 성지는 야생화 들녘으로도 유명한데
-그동안 토종야생화를 심고 가꿔와 280종에 이른다. 이런 이유로 해마다 천주교인 중심으로 3~4만명이 다녀가는데 일부 일반인들도 찾아오고 있다. 개중에는 야생화를 보러 오는 이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현재 줄무덤에 묻혀있는 당시 순교자는 몇 명인가
-총 74기가 있다. 하지만 1959년 미공군기지 설치로 도로가 개설되면서, 당시 도로공사에 참여했던 인부들의 증언에 의하면 107기가 묻혀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줄무덤 한 기에 두세명이 묻혀있기도 하다는 것으로, 7명의 인부 개별증언이 일치한 바 있다.
▶앞으로 이곳 교우촌에 대한 계획을 갖고 있다면
-옛날 교우촌을 재현해 체험장으로 활용하고 싶다. 또한 당시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남아있는 기록물과 순교자들의 유물과 서적 등을 찾아 교우촌박물관도 세웠으면 한다. 역사적 교육가치가 충분히 있으니 가능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