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미술계에선 주변인이지만, 실력에선 ‘빵빵’한 박준우(63) 화백.
활동이 없다 보니 지역에선 ‘그런 사람이 있다’는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천안에 온 지는 4년. "조용히 살고 있죠. 이름 내놓고 하는 활동은 별로 내키지 않아요.”
성품이 조용하다 보니, 사회활동가로는 빵점. 하지만 몇몇 지인들은 그의 농담과 여유, 빼어난 그림솜씨에 높은 점수를 준다. 그리고 대단한 분이 활동이 없는 것을 아쉬워 한다. 초야에 묻힌 인재라고나 할까.
화실의 한켠 공간에는 먼지 앉은 그림들이 빼곡히 차여있다. 최근 것부터 수십년된 작품까지 도서관의 책들처럼 그렇게 꽂혀있는 것. 대부분 느낌있는 그림들이지만 한번도 빛을 못보고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다.
“글쎄요. 개인전시회를 연 것이 30년도 넘었나. 이 부분에선 문제가 있죠. 예술가는 대중과의 소통을 중시해야 하는 것인데…, 예술가로써 참 게으른 거죠.” 그는 예술이 실생활에 도움되지 않으면 활동하기 어렵다는 것, 예전엔 후원자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찾기조차 힘들다는 것, 예술행위는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것 등을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어떤 시각에선 난 타협도 못하는 편이고, 고집을 자초하며 사는 거요.”
한동안 서울을 무대로 인기를 누리던 박 화백은 나이를 먹어감에 여러 생각 끝에 90년대 초 아산 외암리민속촌에 자리를 잡았다. 예술과의 조화를 기대했던 민속촌은 그가 생각하던 비전과 거리가 멀었다. 2001년 예산 저수지 근처의 한 폐교에서 3·4년간 살아도 봤으나 ‘행정적 뒷받침’ 없이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힘겹다고 몇 번인가 느낄 무렵, 천안 불당동을 안식처 삼기로 하고 보따리를 쌌다.
천안 도심지의 화려함을 뒤로 한 채, 때로 적막하기까지 한 그의 화실엔 그래도 풋풋한 사람냄새가 배여있다. 그에게 그림을 배우는 사람들이 몇 있고, 30년 넘게 인연을 맺어오는 서울제자도 있다. 지난 겨울부턴 ‘목요누드크로키’ 회원들의 사랑방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10여 명 남짓한 이들의 역사는 2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코 혼자 살 생각은 없다. 억지로 기회를 만들려는 생각도 없지만 때가 차고, 기회가 오면 지역사회에 미술이 소통하는 체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