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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반려자, 은장도

박완규(43·천안 부성동·은장도 제작자)/ 장애에 대인기피증까지‥ 은장도 기술로 새로운 삶

등록일 2008년04월08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은장도는 남·녀의 것이 따로 있다. 여성용이 13㎝ 정도며, 정절을 지키기 위한 칼날길이가 7㎝에 이른다. 남성용은 호신용이며 여성용보다 큰 20㎝. 손잡이 재질에 따라 나무로 만든 패도, 은으로 만든 은장도 외 물소뿔이나 대나무 등 종류가 10가지에 이른다.

낯선 숲속의 밤, 한줄기 빛을 발견한다면!

박완규(43)씨에게 ‘은장도’는 그렇게 다가왔다.

선천적으로 장애를 갖고 태어난 완규씨. 20살이 됐어도 30㎏이 안나갔다. 방문을 꽁꽁 걸어잠궜다. 왜소한 장애의 몸,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는 게 싫었다. ‘대인기피증’은 점점 심해졌다. “상대방 눈을 못 쳐다봤어요. 사람을 만나는 자체가 무섭고 싫었죠.”

매일이 죽을 것만 같던 삶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22살 되던 해, 스승 강용기(64)를 만나고부터다. “스승님은 전국에 몇 안되는 은장도의 대가였죠. 무형문화재 지정을 놓고 박용기 선생과 다퉜지만, 당시 나이 40을 넘어야 한다는 자격요건이 덜컥 발목을 잡았어요.” 은장도 양대산맥이던 두 사람의 운명이 ‘무형문화재’와 ‘무명’으로 갈렸다.

경기도 성남에서 강용기 스승은 완규씨 하나만 제자로 키웠다. 스승 자신도 장애를 갖고 있어 둘은 잘 통했다. 시장이나 세무서장, 경찰서장, 또는 군 장성들이 선물용으로 구입해가 먹고사는 문제는 크게 어려움 없었다.

그러던 것이 92년 김영삼 대통령의 ‘공무원 선물 안주고 안받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사향길로 접어들었다. 다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마침 용인 에버랜드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은장도 체험학습장을 열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좋은 기회였지만 대인기피증이 그를 괴롭혔다.

은장도와 함께 한 지 9년만인 93년, 부산으로 내려갔다. 예전에 잠시 시계기술을 배웠던 양지재활원에서 이번엔 세공기술을 배웠다. 어렵게 배운 은장도 기술이 빛을 발했다. 수년씩 배운 사람들을 재치고, 3개월만에 전국대회에 나가 1등이나 다름없는 2등을 했다. 남들 3년에 배울 것 1년에 끝내고 버젓이 직장을 잡았다.

은장도와는 달리 잘 나가나 싶다 했더니 97년 IMF의 타격은 귀금속에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경기는 불황이지만 배운 게 그것이라 98년 아예 직원 4명을 두고 공장을 차렸다. IMF의 경기여진이 가라앉자 사업은 날개단 듯 호황을 누렸다.
2005년, 완규씨는 사업장을 접고 천안에 정착했다. 일반인에 비해 폐기능이 절반 수준인데, 세공업을 하면서 금가루와 약품처리로 건강이 악화된 것. “천안이 공기도 좋고, 사람 살기 참 좋아 보이더군요.” 

천안에 정착한 지 3년. 건강은 말끔히 회복됐고, 인생에 가장 고질적인 ‘대인기피증’도 상당부분 해소했다. 우연찮은 인연으로 천안 장애인복지관과 연결돼, 봉사하면서부터다. 장애인 차량이동봉사도 하고 있다. 

진해에 가게도 갖고있어 생계고에 여유로운 요즘. “은장도를 다시 만들고 싶어요. 주변에서 권하는 분들도 있고…, 욕심도 나거든요. 흔한 기술도 아니고, 우리나라 전통의 맥을 잇는 보람도 있고요. 좀 더 생각해 보고 시작할래요.”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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