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관(43·서예가 )알려진 서예가는 많을지 몰라도 김응관씨처럼 바지런한 서예가는 드물 것이다. 펜글씨에 심취하다 대학 때부터 서실을 다니며 본격적인 서예가의 길로 들어선 김 작가는 현재 시민회관 두정분관, 쌍용도서관, 단국대 동양학과 등 5개곳을 출강하고 있으며, 충남미협 사무국장, 천안미협 부회장과 개인 서예학원을 운영중에 있다. “남들은 경기불황에 맞물려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나는 요즘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안사람도 인기있는 한자선생으로 생활에 보탬을 주죠.” 서예는 집중력 뿐 아니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건강에도 좋은 1석3조의 효과가 있다고.그동안 어려운 고비도 많았다. 유비무환의 정신과 아내의 내조가 없었다면 가능할까 스스로 반문한다. IMF때 남들은 허리띠를 졸라맸지만 그는 대학원을 다니며 앞날을 위한 투자에 더욱 정진했다. 한때 친구와 간호학원도 차렸지만 부잣집 외아들의 나약한 심성으로는 얼마 버티지를 못했다. 삶에 절망이 찾아들자 가족을 향한 아내의 강인함이 고개를 들었다. 가정을 돌보며, 틈틈이 서울의 유명한 한자스승을 찾아 몇 년을 오르내리며 단숨에 한자1급 자격증을 땄다. 아내의 내조에 김 작가도 힘을 냈다. 2000년 용의 해에는 각 기관과 단체에 용 그림의 연하장을 직접 그려 보냈다. 기회는 노력하는 자에게 온다고, 당시 근로청소년 복지회관에서 강사가 필요하다는 연락이 오며, 차츰 ‘서예가 김응관’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게 됐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알아요. 나 여기있소 하기엔 아직 갈 길이 멀죠. 나를 알아보는 이들에게 더욱 자세를 낮춰야 한다는 걸 서예의 선현들을 통해 배웠고, 그렇게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지난해 천안예술제 때에는 스스로 대형 퍼포먼스를 기획한 덕분에 고생을 샀다. “사방 5m짜리 광목을 뜨거운 물에 삶아 세탁하고 다리미로 다녔죠. 중앙에 천안예총을 상징하는 대형크기의 ‘예(藝)’자를 쓰고 1천여 명 넘는 시민들이 서명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안사람과 후배 등의 고생이 말할 수 없었는데 정작 당일에는 사람도 없고 날씨도 추워 고생이 물거품이 됐죠. 나중에 알아주는 이도 없더군요.”그래서일까. 올해는 오는 6월10일 있을 제2회 천안예술제 ‘홍보맨’을 작정하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