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수
박민수씨는 자신을 ‘옹기쟁이’라 소개한다. 43년간 막사발을 빚었음에도 자신을 낮추는 건 막사발만큼 소박한, 자연을 닮았음이다.
5대째 가업 잇는 박민수씨, 43년째 자연닮은 막사발 만들기에 전념막사발은 꾸밈이 없다. 꾸밈이 없다는 것은 사심이 없는 자연스러움이다. 자연의 기운이 깃든 막사발에는 인간 삶의 이치도 담겨있다.
막사발은 밥이나 국을 담는 그릇이었다가 오래 되면 막걸릿잔으로, 더 험해지면 개밥그릇이 됐다가 그나마도 깨지면 흙으로 돌아가는 서민들의 생활잡기를 통칭한다. 상류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청자, 백자, 분청사기라면 막사발은 하층민의 문화를 상징하는 그릇이었던 셈이다.
천안에서 한 걸음 벗어난 곳에 ‘옹기쟁이’ 산다. 천안 입장에서 진천가는 길. 바우덕이 못미치는 곳에 황토가든처럼 보이는 건물이 하나 있다. 5대째(1백76년) 옹기를 굽고 있는 박민수(57)씨의 작업장이다. 주소지는 안성. 몇 걸음 옮기면 천안이고, 반대편으로 조금 더 뛰면 진천인 3도의 경계점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스스로 ‘옹기쟁이’라 낮추는 그를 보면 막사발과 많이 닮았다. 15살 이후로 43년째 매일 해오는 일. 이젠 막사발과 그가 품성적으로 닮아 헷갈릴 만해졌다. 그가 손에 막사발을 하나 든다. 어느 일본인이 300만원을 줄 테니 팔라 했던 막사발이다.
“만들기도, 나오기도 힘든 막사발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수천번을 거듭해도 내 뜻대로 나올 수 없는 사발이죠.” 볼 줄 모르는 기자에게 “한마디로 이것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가장 자연을 닮았다’는 것에서 다른 막사발보다 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다.
그의 5대째 가업이 전승된 곳은 ‘공주’였다. 아버지대에 이르러 찬바람이 불었다. 교도관이던 아버지가 가업을 이으며 생활이 곤궁해졌다. 그 덕인지, 천성인지 15살되던 때 그의 옹기쟁이 삶이 시작됐다.
“옹기쟁이 삶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십니까. 이곳에 배우러 오는 이들이 가끔 있는데 한 달을 채 못버티고 도망갑니다.”
결국 일로서는 매력없는 직업이다. 하지만 마음이 순수한 자, 소탈한 자, 순박한 자, 그래서 자연과 벗삼는 자만이 자격을 부여받았음을 은근히 자랑한다. 아버지 대에서 머뭇거린 가업이 그의 대에서 또다시 흔들린다. 딸만 둘인데 사위마저 좋은 직장에 다니니 “하던 일 그만 두고 가업을 이으라” 말하기 어렵다.
한다고 하면 하라고 할 텐데 그것도 ‘인연 따라’ 가는 거라며 일찌감치 마음을 놓았다. 다행히 대학을 막 졸업한 제자 하나가 5개월째 그의 밑에 있다. “마음은 된 것 같습니다. 자기는 얼마든 견딘다고 하는데… 모르죠.”
이곳은 제자 말고도 좋아서 배우는 회원이 15명, 이 중 5명은 5년째 줄곧 찾는다. 배우고자 하는 이들, 마음이 열린 이들에게 이곳은 언제나 열려있다.
“집사람과 저, 달랑 두 식구입니다. 이곳의 그릇 대신 쌀이나 차 한 통 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못 살 염려는 없습니다.” 모든 이가 바라는 안빈낙도의 삶이다.
흙, 불, 물, 장인이 일심이 돼 만든 그릇, 그것은 사람이 아닌 자연이 만든 것이다. 흙과 불과 물이 조화된 자연 그대로의 그릇이다. 막사발 특유의 비파색도 잿물(유약)보다는 흙 자체에서 얻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별명은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다. “좋은 흙을 찾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다니는 통에 생긴 별명입니다. 그러다 생긴 일이 많은데 간첩으로 몰려 끌려간 것도 2번입니다.”
옛날 조상들이 막사발을 구울 때는 단지 ‘밥을 먹기 위해’ 그것을 빚었을 것이며 거기에는 기교도 없고 터득도 없는 무아무심의 상태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도 그같은 선조를 따라가고자 매일 마음 비우는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